김종범

김종범

[ 金鍾範 ]

요약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로 일본에서 북성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귀국 후에는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상무집행위원과 북풍회 조직 등으로 활약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에 입당했고, 대한식량공사 이사를 지냈다.
출생-사망 1892 ~ ?
별칭 추산(秋山)·천일(天一)
국적 한국
활동분야 사회주의 운동
출생지 경남 창원
주요저서 《해방 전후의 조선 진상》

필명은 추산(秋山)·천일(天一)이며, 1892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1921년 4월 조선교육개선회 위원 및 조선청년연합회 의장 가운데 1명으로 선임되었으며, 그해 9월 조동혁(趙東爀) 등과 함께 부관연락선 화물적치장에서 종사하면서 반일문서를 노동자에게 나누어주고 부산부두노동자 총파업을 조종한 혐의로 검거되었다.

1922년 1월 부산청년회 총무부 간사에 선임되었으며, 그해 12월 오사카[大阪]의 일본재류조선노동상황조사회 간부로 있을 때 조선노동회 간부 (李桓發)의 부탁으로 신지관(新支館)에서 자유노동조합 취지서를 인쇄한 혐의로 검거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923년 1월 도쿄[東京]에서 (金若水)·송봉우(宋奉瑀)·(卞熙鎔)·(李如星) 등과 함께 단체인 북성회(北星會)를 결성하였으며, 이어 8월에 북성회 국내순회강연단의 일원으로 귀국하여 와 운동 노선의 차이로 마찰이 일어나 서울청년회 소속의 (崔昌益)을 구타한 사건인 일명 장안여관사건에 가담하였다.

같은해 8월에는 박이규(朴珥圭)·김약수·송봉우 등과 함께 낙양관(洛陽館)에서 서울청년회 회원 (金榮萬)·허일(許一) 등에게 피격되었으며(일명 낙양관사건), 1924년 3월 정우홍(鄭宇洪) 등과 함께 좌경적 노동운동을 목적으로 한 건설사(建設社)를 결성하였다.

같은해 4월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이어 11월에 김약수·송봉우 등과 함께 북성회의 국내지부인 북풍회(北風會)를 결성하였다. 1925년 6월 중심의 의 부당성을 코민테른(인터내셔널_제3인터내셔널)에 보고하기 위해 로 간 뒤, 1927년 7월 펑톈[奉天]에서 검거되었으나 탈옥하였다.

이듬해 [吉林省] [長春]에서 다시 검거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뤼순형무소[旅順刑務所]에 수감되었다. 1929년 9월에 만기 출감한 후 (國民府)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벌였다.

광복 직후 에 입당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한국 쌀의 강제 공출 및 배급통제를 위해 설치한 조선식량영단의 후신인 대한식량공사(1948년 11월 설치, 1950년 11월 해체) 이사가 되었으나 각종 부정사건을 책임지고 물러났다. 저서에 《해방 전후의 조선 진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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