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유씨

기계유씨

[ 杞溪兪氏 ]

요약 경상북도 포항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기계'는 포항의 옛 지명이었다. 시조는 유삼재(兪三宰)이다.

시조는 신라때 아찬을 역임한 유삼재(兪三宰)이다. 그의 후손인 유의신(兪義臣)이 신라가 멸망한 뒤 고려에 복종하지 않자 태조가 그를 기계현(杞溪縣: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의 호장(戶長)으로 삼았으며, 그의 후손들이 기계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었다. 고려 전기에는 여러 대에 걸쳐 은둔하였으며, 후기에 경기도로 이주한 유득선(兪得瑄)·유선(兪僐)·유승계(兪承桂) 3대가 출사하여 현달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98명의 문과 급제자와 3명의 상신을 배출하여 열력(閱歷)이 단연 뛰어났다.

대표적 인물은 (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유응부(兪應孚)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 평안도절제사를 거쳐 중추원동지사로 있을 때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같은 시기에 유효통(兪孝通)은 세종 때 을 거쳐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전의감정(典醫監正) (盧重禮)와 함께 약용식물(藥用植物)을 정리한 《향악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과 향약방문으로 된 의서 《(鄕藥集成方)》을 편찬하였다.

유효통의 재종제인 유해(兪解)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으나, 그의 자손들이 기계유씨를 명문으로 발전시켰다. 유해의 손자 유여림(兪汝霖)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예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지냈으며, 후손들이 조선 중기에 명성을 떨쳤다. 아우 유여주(兪汝舟)는 학자이며 명필이었다. 여림의 아들 유강(兪絳)은 명종·선조 때 문신으로 호조판서에 이르렀으며,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인재를 모아 가르쳐 문풍을 일으킴으로써 이때부터 함경·평안 양도 선비들도 과거에 많이 오르게 되었다.

유여림의 손자 유홍(兪泓)은 선조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시문가(詩文家)·장서가(藏書家)로 알려졌다. 그의 아들 유대수(兪大脩)·유대진(兪大進)·유대일(兪大逸)·유대정(兪大禎)·유대경(兪大儆)·유대건(兪大建) 등이 모두 선조와 광해군 때 벼슬을 하였다. 유대일의 아들 유백증(兪伯曾)은 에 공을 세우고 이조참판·대사간을 지냈으며, 정묘· 때 끝까지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유대정의 아들 유수증(兪守曾)은 소북파(小北派)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사위로, 유영경이 광해군 즉위 초 대북파(大北派)에 의해 숙청되자 12년 동안 은거하였다가 인조반정 뒤 을 지냈다. 유강의 증손 유성증(兪省曾)은 병자호란 때 강화에 들어가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활약하고, 뒤에 강원도관찰사·예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유성증의 두 아들 유황(兪榥)·유철(兪櫛)과 그의 재종질인 유계(兪棨)은 모두 1633년(인조 1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유황은 인조 때 관찰사를 지냈으며, 척화론자로 두 차례나 유배되었고, 유철은 경기도관찰사·대사간을 거쳐 현종 때 에 이르렀다. 유계는 현종 때 예문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조참판을 지냈으며, 고대 예설(禮說)의 근원과 흐름을 밝힌 《(家禮源流)》를 지었다.

유철의 손자 유척기(兪拓基)는 영조 때 (老論)의 원로로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대 명필로서 (金石學)의 권위자였다. 그의 사촌형 유최기(兪最基)도 대사성·대사헌·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유척기의 조카 유언집(兪彦鏶)과 유언호(兪彦鎬) 형제도 영조·정조 때 현달하였는데, 특히 유언호는 정조의 신임을 받아 문화정치를 펴는 데 공을 세워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밖에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대사성·강화부유수를 지내고 시문에 뛰어났던 유언민(兪彦民), 알성문과·문신정시·문과중시에 각각 급제한 수재로서 대사헌·중추부지사를 지내고 역시 시문에 뛰어났던 유언술(兪彦述)도 같은 항렬이다.

숙종에서 정조 대에 걸쳐 성세를 보였으며, 그뒤에도 학자·문인을 많이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은 영·정조 때 서예가로 전서·예서의 대가 유한지(兪漢芝), 순조 때 대문장가 유한준(兪漢門), 성리학의 대가 유신환(兪莘煥), 한말 서예가로 특히 초서에 뛰어난 유창환(兪昌煥) 등이다. 또 유호인(兪好仁)은 성종 때 시·문·글씨에 뛰어나 3절(三絶)이라 불렸다.

구한말에는 개화의 선구자 유길준(兪吉濬)은 (金弘集) 내각의 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음력 폐지와 양력 사용, 종두법(種痘法) 시행, 우편제도 실시, (斷髮令) 시행 등 많은 개혁정책을 수행하였다. 또 일제강점기에 유민식(兪民植)은 이명(異名)이 정근(政根)으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옥고를 치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고, 《조선일보》사장을 지낸 유진태(兪鎭泰)는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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