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희

박용희

[ 朴容羲 ]

요약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와 종교인으로 활동했다. 3·1운동 때는 독립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경기도·충청도 지역 연락 책임자로 활약했다.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면서 선교활동에도 힘썼다.
출생-사망 1884.12.11 ~ 1959.5.16
국적 한국
활동분야 독립운동·종교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건국포장(1977), 건국훈장 애국장(1990)
주요업적 신사참배 반대운동

1884년( 21) 12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8년 동양선에서 운영하는 도쿄성서학원[東京聖書學院]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용인(龍仁)에서 에 힘썼다. 1919년 때는 (李昇薰)·(咸台永) 등과 독립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경기도· 지역 연락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3·1운동 뒤에는 된 기독교쪽 보호에 힘썼다.

이어 로 건너가 수립에 참여해 경기도 조사원으로 활약했으며, 1920년부터는 2년 동안 [龍井]에서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높이고 독립사상을 닦고자 노력하였다. 1921년 귀국해 (尹致昊)·(李商在)·유성준(兪星濬) 등과 기독교 창문사(彰文社)를 세우고, 같은 해 안성교회 를 거쳐 1925년 안수를 받았다.

1927년 (新幹會) 결성에 참여해 안성지회장으로 활약하였고,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서울 승동교회, 목포 중앙교회, 순천 중앙교회 목사를 지내면서 의 궁성요배(宮城遙拜)와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40년 10월 일본 에 체포되어 1942년 에서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8·15광복 뒤에는 입법위원, 기독신민회 초대회장을 거쳐 1953년 기독교장로회 총회장, 한국신학대학(현 )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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