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화
[ 金在華 ]
- 요약
일제시대 경상북도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8일 청도군 운문면의 3·1운동을 주도했다. 면서기와 면장으로 하여금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며,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출생-사망 | 1892.7.7 ~ 192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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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한국 |
활동분야 | 독립운동(3·1운동) |
출생지 | 경남 진주 |
주요수상 | 대통령 표창(1977), 건국훈장 애국장(1991) |
1892년( 29) 7월 7일 진주(晉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의 3·1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강달영(姜達永)·강상호(姜相鎬)·
권채근(權采根)·박진환(朴進煥)·이강우(李康雨)·박용근(朴龍根) 등과 만세운동을
계획 추진하였다.
이들은 먼저 비밀리에 독립선언서와 을 제작 배포하였는데, 군경이 이
사실을 눈치채고 각 에 휴교령을 내리는 한편, 일본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정탐하도록 지시하는 등 삼엄한 경계망을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김재화는 동지들과 함께 계속 조직을 확대하면서 악대원 출신인
이영규(李永圭)·천명옥(千命玉) 등에게 시위 당일 주악(奏樂)을 부탁하는 등
계획대로 밀고 나갔다.
거사 당일인 3월 18일 오후 1시 무렵, 이영규가 (飛鳳山)에 올라가 을
불자 이를 신호로 3개 지역에 흩어져 있던 시위대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진주 장터로 몰려들었다. 사태를 절감한 일본 과 이 소방대까지 동원해
물감과 오물을 뿌리며 으로 을 난타하였으나, 시위군중은 더욱 늘어나 오후
4시 무렵 도청 앞에 모여든 군중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서 일제의 대대적인 가 시작되어 300여 명이 되었는데,
김재화 역시 이때 체포되었다. 같은 해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으로 형 집행이 정지되어 출감하였으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 4월 15일 하였다. 1977년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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