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제

김용제

[ 金庸濟 ]

요약 김구와 함께 애국 계몽운동, 민족교육에 운동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다.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하고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해 활동하였다. 1920년 12월부터는 임시정부의 국내 비밀조직망인 연통제에서 활약했다.
출생-사망 1878.10.26 ~ 1931.2.23
본관 안동
별칭 용제(容濟)
국적 한국
활동분야 계몽운동·독립운동
출생지 황해 안악
주요수상 건국포장(1982), 건국훈장 애국장(1990)

본관은 안동(安東), 이명(異名)은 용제(容濟)이다. 1878년( 15) 10월 26일 안악(安岳)에서 태어났다.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종형제(從兄弟)로, 일찍부터 기독교에 몸담아 신문화를 접하였다. 1906년 고향에서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해 청년들에게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07년 (安昌浩)·(尹致昊)·(申采浩)·(朴殷植) 등이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자 김구·김홍량(金鴻亮)·(崔明植)·김용진(金庸震) 등과 이에 가담해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김구·송종호(宋鍾昊) 등과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결성해 에 힘썼고, 1909년 10월에는 구국투쟁기지 설치를 목적으로 최명식을 만주로 파견해 그 일대를 답사하도록 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가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10년 12월에 일어난 을 빌미로 많은 신민회원을 하여 한, 이른바 105인사건으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1년 9월 경성에서 7년의 형을 선고받은 뒤, 1913년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날 때까지 2년간 고초를 겪었다.

1919년에는 일제의 감시로 인해 에 참가하지 못하였고, 1920년 12월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비밀조직망인 연통제(聯通制)에 가담해 참사(參事)로 있으면서 군자금 모금과 항일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1982년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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