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오

최동오

[ 崔東旿 ]

요약 만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요인사였다. 1932년에는 국무위원,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에도 비상국민회의 부의장·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으로 활약하였는데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출생-사망 1892.6.22 ~ 1963.9.16
의산
별칭 학원, 지석호
국적 한국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평북 의주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90)

호는 의산(義山), 이명(異名)은 학원(學源)·지석호(池錫浩)이다. 의주(義州)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의주에서 3·1운동을 전개하고 중국 [上海]로 망명하였다. 1922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상해기성회에 조직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이어 1923년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출범하자는 창조파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되자, 창조파 인사들과 함께 러시아 로 가서 신정부인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을 조직하려 하였으나 레닌의 죽음 등 러시아 정국의 변화로 승인을 얻지 못하고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그후 [吉林省]에서 정의부(正義府) 산하의 정치군사학교인 화성의숙(華成義塾)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고, 길림한교문제연구회(吉林韓僑問題硏究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정의부 대표로서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전선 통일을 위한 3부(정의부··) 통합운동을 벌였고, 1929년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자 중앙집행위원 및 외교위원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국민부의 유일당인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중앙위원 겸 국제부장에 선임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만주지역을 떠나 중국 본토로 이동, 상하이·[北京] 등지에서 (柳東悅)·(梁起鐸)·(金學奎)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의 정치활동을 계속하였다.

1932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으로 선임되었으며, 그해 10월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조선·한국혁명당·한국광복단동지회 등 각 단체의 대표들이 상하이에 모여 민족통일전선의 일환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할 때 조선혁명당 대표로 참여하여 (金枓奉)·(尹琦燮)·(金奎植)·(朴健雄)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35년 7월에는 [南京]에서 결성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및 선전부장이 되었으며, 1937년 4월 (池靑天)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여 조선혁명당을 재건하고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 1940년 5월 한국독립당 중앙간부로 선출되었으며, 한중문화협회 감사, 임시정부 법무부장, 임시의정원 법사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광복 때까지 활동하였다. 귀국 후 1946년 비상국민회의 부의장, 좌우합작위원회 우파 대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부의장을 거쳐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남측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1950년 때 납북되어 1956년 납북인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집행위원 겸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63년 9월 16일 로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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