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욱

이종욱

[ 李鍾郁 ]

요약 월정사 주지로 있으면서 한때 3·1운동에 참여하고 임시정부 국내특파원으로 활동했으나 친일파로 변절하여 일본군용 비행기 구입을 위한 모금활동과 일본승전 법회를 열었다. 또한 일제의 창씨개명, 조선 청년 징병제 등에 적극 찬동하고 선동하는 역할을 했다.
출생-사망 1884.1.13 ~ 1969.11.3
국적 대한민국
활동분야 불교(1930~1945 월정사 주지, 1941~1945 조계종 종무총장)
출생지 강원 평창

1884년 평창(平昌)에서 출생하였다. 1896년 출가하였고 1898년 강원도 양양 명주사(明珠寺)에서 사미계를 받았고 전남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강원도 (月精寺)에 머물렀다. 1919년 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고, 을사오적 매국노를 제거하기 위해 조직된 '27결사대'에 참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같은 해 4월 (漢城臨時政府) 수립에 계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대한적십자사를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의 국내특파원으로 서울에 파견되었다. 그해 6월 (安在鴻)·송세호(宋世浩)·(延秉昊)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항일비밀단체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고, 8월 독립운동자금과 건의서를 임시정부에 제출하였다.

같은 해 10월 대동단(大同團) 단장인 (金嘉鎭)과 이강(李堈)의 탈출을 주도하여 김가진의 상하이 망명을 도왔으나, 의친왕은 만주 안둥[安東]에서 탈출계획이 발각됨으로써 실패하였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 내무부 참사에 임명되었으며, 1920년 3월 임시의정원 강원도의원에 선출되었다. 한편, 같은 해 6월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사건으로 대구 궐석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1년 3월 임시정부 내무부 특파원으로 다시 국내로 들어와 연통제(聯通制) 조직을 위하여 활동하다 같은 해 8월 일본경찰에 되어 함흥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오대산 월정사에서 승려로서 연통제조직을 지하화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회유로 친일파로 변절하였으며 1937년 전국 조선불교 사찰의 승려들에게 헌금을 모아 일본군에게 비행기를 헌납했다. 그가 이런 강제 할당식 모금활동으로 1942년까지 일본군에게 헌납한 비행기는 모두 5대에 이른며 '조선불교호'라고 명명했다. 또한 북지황군위문단을 조직하고 중국 화북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는 일본군을 직접 위문하기도 하였다. 1938년에는 일제가 지은 조선신궁을 참배하였고, 1939년에는 일본군 전사자 위령제에 참석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실시하자 관할 사찰의 모든 승려들이 창씨개명토록 독려하였다. 1940년에는 자신이 주지로 있는 월정사 젊은 승려 4명을 일본군 지원병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1942년 조계종 본산인 태고사(현 서울 종로 소재 조계사) 대웅전에서 '지나사변(중일전쟁) 5주년 기념 위령대법회'를 열었다. 1943년 군수물자 충당을 위해 '불교 금속류 헌납 법요식'을 열고 관할 사찰의 범종 4350근, 구리와 유기제품 등 4320Kg를 수거하여 일본 조선군사령부에 헌납하였다.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자 전국의 사찰에 공문을 보내 일본의 승리와 미국의 항복을 기원하는 법요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광복 후인 1945년 8월 친일행적으로 종무원 전 승려가 사직하였고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그해 12월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강원도 대표로 선출되었고,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에는 강원도 평창에서 국회의원(2대)으로 당선되어 정치인으로 복귀하여 불교계의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 이듬해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친일행적으로 사직하였던 조계종 총무원장에 복직하였다. 1967년 구례 화엄사에서 사망하였다. 1977년 건국유공자로 인정되어 독립장이 추서되었다가, 친일행적이 드러나 2010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1978년 사리를 옮겨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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