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우
[ 李鳳雨 ]
- 요약
일제시대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국민회에 가담하여 육영사업과 교육사업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임시정부 산하 국민회에 소속해 군자금 모금 등을 담당하기도 했다. 활동 중 일본 관헌에 피살되었다.
출생-사망 | 1873.7.15 ~ 192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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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경주 |
호 | 백단 |
별칭 | 봉우(奉雨) |
국적 | 한국 |
활동분야 | 독립운동 |
출생지 | 부산 |
주요수상 | 건국훈장 독립장(1980) |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백단(白旦), 이명(異名)은 봉우(奉雨)이다.
부산(釜山)에서 출생하였다. 1908년 간도로 망명, 1910년 허룽현[和龍縣]에서
정동중학교(正東中學校)를 설립하는 등 육영사업에 힘썼다. 1914년 북간도
장재촌(長財村)에서 이동휘(李東輝)·(具春先)·(馬晋) 등이 조직한
국민회(國民會)에 가담하여 교육활동에 주력하였고, 1918년 11월
김교헌(金敎獻)·박은식(朴殷植)·안창호(安昌浩)·김동삼(金東三) 등 39인이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선포할 때 북간도국민회 대표로 서명하였다.
1919년 3월 룽징촌[龍井村] 국자가(局子街)에서 독립선언식을 개최한 뒤 벌어진
만세시위 중에 중국군이 발포한 사건이 일어나자
구춘선·강봉우(姜鳳雨)·고용환(高容煥)·강구우(姜九禹)·박승필(朴昇弼) 등과
함께 도윤공서(道尹公署)에 배상책임을 따지기도 하였다. 그해 4월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의 의사부원(議事部員)으로서
구춘선·마진·유예균(劉禮均)·최원일(崔元一)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어
[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독립기성총회가 임시정부 산하의
국민회로 개편됨에 따라 군자금 모집과 군비확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한편, 후 (大韓獨立軍)이 러시아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당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이 일어나자, 1921년 9월 구춘선(具春先)과 함께 국민회
대표로 재만단체성토문(在滿團體聲討文) 및 군정의회선포문(軍政議會宣布文)을
발표하였다. 그뒤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위하여 상하이로 가던 중 일본관헌에게
피살되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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