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직

이관직

[ 李觀稙 ]

요약 한일신협약과 군대의 강제해산이 있은 후 신민회에 소속하여 구국계몽운동에 힘썼다. 1911년 간도지방에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무관을 양성하기도 했다. 3·1운동 후 학생동원 책임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생-사망 1883.7.10 ~ 1972.10.19
본관 한산
본명 자 치용
국적 한국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충남 공주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90)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치용(穉用)이다. 1882년(고종 19) 충청남도 공주(公州)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연안부사 승위(承緯)이다. 1903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보병과를 졸업하고 육군 보병 참위(參尉)에 임관되었다. 1905년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에서 근무하였고, 1907년 육군 보병 부위(副尉)가 되어 진위보병 제2대대에서 근무하였다.

1907년 8월 으로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金東三)·하중환(河中煥)·유인식(柳寅植) 등과 함께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협동학교(協同學校)에서 애국교육을 통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고, 신민회(新民會) 회원으로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9월 제2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하여 (李會榮)·이동녕(李東寧)·장유순(張裕淳) 등과 간도지방을 다니면서 장소를 물색하여, 1911년 4월 이회영·이동녕·이상룡(李相龍)·김창환(金昌煥)·(呂準)·이탁(李鐸) 등이 류허현[柳河縣] (三源堡)에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무관양성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자 김창환·이광(李光)·윤기섭(尹琦燮) 등과 함께 군사교관으로 사관생도를 훈련하였다.

1912년 가을에는 장도순(張道淳)과 함께 국내로 파견되어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였으며, 1913년 이회영이 귀국하자 그를 도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培材學堂)의 학생동원 책임자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45년 광복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기독교에 귀의,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광정성결교회(廣亭聖潔敎會) 집사로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1990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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