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훈

이강훈

[ 李康勳 ]

요약 3·1운동 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국무총리실 비서로 일했다. 신민부에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민립중학을 설립해 항일교육에 주력했다. 1933년 주중일본공사 암살계획이 실패로 돌아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생-사망 1903.6.13 ~ 2003.11.12
본관 전주
청뢰
국적 한국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강원 김화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77)
주요저서 《해외독립운동사》, 《항일독립운동사》, 《독립운동대사전》, 《대한민국임시정부사》, 《마적과 왜적》, 《민족해방운동과 나》, 《무장독립운동사》, 《청사에 빛난 선열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청뢰(靑雷)이다. 강원도 김화(金化)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上海]로 건너가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실에서 비서로 근무하였다. 1921년부터 북간도 연길도립사범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5년 신민부(新民府)에 가담, 1926년 (金佐鎭)의 지시로 안도현(安圖縣) 삼인방(三人坊)에 있는 신창학교(新彰學校)에 재직하는 등 신민부 산하의 각급 학교에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29년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가담, 같은 해 12월 해림(海林)에서 북만민립중학기성회(北滿民立中學期成會)를 개최하고 이지산(李之山)·김야운(金野雲)·김유성(金有聲)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서 민립중학을 설립하여 한인청년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32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담한 뒤, 1933년 3월 남화한인청년연맹의 행동단체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해 (白貞基)와 함께 중국을 방문한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일본으로 압송되어 1933년 11월 나가사키[長崎] 지방재판소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8·15광복으로 출옥한 뒤, 재일한국거류민단 부단장을 지내고 1960년 귀국하여 한국사회당(韓國社會黨) 총무위원으로 활동, 1961년 5·16군사정변 때 혁신계 정당 간부로 활동하다가 투옥되어 1963년 석방되었다. 1969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1977년 독립운동유공자 공적심의위원, 1988년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고, 저서로 《해외독립운동사》·《항일독립운동사》·《독립운동대사전》·《사》·《마적(馬賊)과 왜적(倭賊)》·《민족해방운동과 나》·《무장독립운동사》·《청사(靑史)에 빛난 선열(先烈)들》 등이 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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