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영

신덕영

[ 申德永 ]

요약 만주에서 호분중학교를 설립해 군사교육을 실시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3·1운동 이후 귀국해서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27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했으나 실패했다.
출생-사망 1890.11.25 ~ 1968.5.26
하관
별칭 일명 백한, 이평
국적 한국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3)

호는 하관(何觀), 일명은 백한(伯漢), 이평(李平)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1914년 만주로 건너가 (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16년 간도에서 교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1917년 북만주 동녕현(東寧縣)에 호분중학교(虎賁中學校)를 설립하고 학감으로 있으면서 군사교육을 담당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李東寧)·(朴殷植)의 군자금 모금 지시로 귀국하여 대동단(大同團)에 가입, 1920년 7월 (盧衡奎)·노석중(盧錫中)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지원을 위한 부한청년단(扶韓靑年團)을 조직하고, 대동단 명의로 포고문과 경고문을 작성하여 전라남도의 부호들에게 발송하였다. 또 같은 해 10월에는 광주(光州)에서 이윤호(李允鎬)·노석정(盧錫正) 등을 부한청년단에 가입시키고, 신유선(辛有善)·정호필(鄭鎬弼)·정원채(鄭遠采) 등에게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로 보냈다.

그해 11월 전라남도 담양(潭陽)과 곡성(谷城)지역을 맡아 최양옥(崔養玉)·노기준(盧基準)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활동을 계속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5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3년 5월 신병으로 가출옥, 세브란스병원에서 가료 중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1927년 최양옥·(金正連) 등과 함께 중국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부[太原府]에서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목적으로 비행학교설립을 계획, 그 자금 모금을 위해 최양옥·김정련을 국내에 파견하였으나 이들이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뒤 [哈爾濱]에서 지하활동을 벌이던 중 1932년 6월 다시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3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광복 후에는 재외이재동포원호회(在外罹災同胞援護會)를 설립하여 독립투사들의 원호사업에 힘썼으며 광복단(光復團)을 부활하여 중앙총본부 단장과 대한독립운동자동맹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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