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복

이유복

[ 李裕福 ]

요약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양성면과 원곡면 일대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천여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양성면 주재소와 면사무소,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집 등을 파괴했다.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출생-사망 1896.1.27 ~ 1919.7.4
국적 한국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경기 안성
주요수상 건국훈장 애국장(1991)

1896년( 33) 1월 27일 안성(安城)에서 태어나, 1919년 4월 1일 (陽城面)·원곡면(元谷面) 일대에서 항일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3월 28일 이유석(李裕奭)·최은식(崔殷植)·홍창섭(洪昌燮) 등과 함께 이시련(李時連)의 집에 모여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다음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어 마을 단위로 봉화 시위를 시행하여 분위기를 고조시킨 뒤, 4월 1일 당일에 1,000여 명이 원곡면 면사무소에 집결하자, 이유복은 이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이며 남길우(南吉祐)를 선두로 양성을 향해 나아갔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한 뒤, 다시 양성면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고 계속 나아가 양성에 도착하였다.

이 무렵 양성 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돌아가던 양성면의 면민 1,000여 명과 합류하면서 시위 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에 이들은 경찰주재소 앞에 도착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운 뒤, 다시 양성 우편소를 파괴·방화하였다. 이어 인이 경영하는 점과 일본인 자의 집을 파괴하고, 시위 군중과 함께 양성 뒷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친 뒤 해산하였다.

이튿날 새벽 4시에 원곡면으로 돌아온 뒤에도 면사무소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되었다. 그후 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다시 동지들과 함께 옥중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의 발포로 중상을 입고 7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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