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

유림

[ 柳林 ]

요약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부흥회, 자강회, 서로군정서, 비밀결사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한중항일연합군 등을 결성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고 광복 후에는 비상국민회의 부의장, 대한국민의회 의장 등을 지냈다.
단주 유림 선생 묘

단주 유림 선생 묘

출생-사망 1898.5.3 ~ 1961.4.1
본관 전주(全州)
단주(旦洲)
본명 화영(華永)
국적 한국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경북 안동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2)
주요저서 공저 《한글말본》 《깊더조선말본》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화영(華永), 호는 단주(旦洲)이다. 1898년( 35) 5월 23일 안동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을 익혔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 합병하자,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는 혈서를 쓰고 항일 독립운동에 몸 바칠 것을 맹세한 뒤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5년 안동에서 부흥회(復興會)를 조직하고, 1917년 대구(大邱)에서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에 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 뒤, 만주로 건너가 (金東三)·(李相龍)·(池靑天) 등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고 국내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거쳐 1922년 [臺灣]의 청두대학[成都大學] 문과에 입학하면서 자로 변신하였다. 같은 해 [上海] 대한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1925년에는 폭동[武昌暴動]에 참가하는 한편, (金枓奉)·(申采浩) 등과 《한글말본》 《깊더조선말본》을 저술하였다.

1928년 정의부(正義府)에 들어가 활동한 뒤, 이듬해 10월 임중학(林仲鶴)·최갑룡(崔甲龍) 등과 평양에서 비밀결사 (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해 활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3년 5월 5년의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인 1940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한중항일연합군(韓中抗日聯合軍) 조직에 힘쓴 뒤, 1942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대표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어 이듬해 8·15광복으로 임시정부와 함께 환국하였고, 1946년 부의장, 독립노동당(獨立勞動黨) 당수, 1947년 전국혁명자총연맹 창립 위원장, 1948년 대한국민의회 의장,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 대표간사 등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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