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의 역사

목화의 역사

목화의 원산지는 인도로 알려져 있다. 목화는 가장 오래 된 로서, 역사에 기록되기 훨씬 전부터 이용되었다. 인도에서는 BC 1800년부터 목화를 사용하였으며, BC 1500∼AD 1500년에 걸쳐 목화공업의 중심을 이루었다고 한다. 목화가 인도로부터 유럽에 전래된 것은 회교도에 의해서다. 영어의 ‘cotton’이라는 말도 의 ‘qútun’ 또는 ‘kútun’에서 유래되었다. 목화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BC 600년경 인도로부터 불교전파와 함께 승려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고려 말 1363년( 12) 문익점(文益漸)이 도입하였다. 그는 원(元)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붓대 속에 목화 를 숨겨왔다. 그래서 지금의 경상남도 에 살았던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주었고, 이를 재배하게 하였다. 이것이 한국에서 목화를 재배하게 된 시초가 된다. 정천익의 아들 문래(文來)가 제사법을 발명하였고, 손자 문영(文英)이 면포 짜는 법을 고안하였다. 문익점이 가져왔던 목화는 그 종류가 아시아면이다. 이는 숙기가 빠르고 탄력이 강하여, 이불솜이나 옷솜에는 적당하다. 그러나 수량과 섬유장, 조면비율 등에 있어서는 개량종인 육지면보다 원료면에서 훨씬 떨어진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아시아면에서 육지면으로 점차 대체 재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1904년부터 목포 면작시험장(현재의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 목포지장)에서 육지면의 품종육종시험을 하였다. 이를 통해 조숙계 113의 4호(목포 1호)·풍산계 380호(목포 2호)·목포 3호·목포 4호·목포 5호·목포 6호·목포 7호가 육성되었으며, 수원 작물시험장에서는 수원 1호가 육성되었다. 현재 남부지방에서 장려되고 있는 목화 품종으로는 목포 6호·목포 7호·수원 1호가 있다. 목화는 원래 열대성 작물이기 때문에, 온도가 높고 성장기간도 충분히 길어야 한다.

한국과 같이 온도가 낮고 성장기간이 짧은 곳에서는, 에 많은 시일을 소비하게 되므로 성숙이 늦어진다. 따라서 솜이 열리기 전에 가 내리면, 섬유생산이 감소되고 탄력이 없는 불량면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목화 성장에 적당한 적지는 이 최소한도 200일 이상 되는 북위 37∼38°선의 지대라고 할 수 있다. 12℃ 이상에서 하며, 그 후 성장기간에 15℃ 이상이라야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또한 물이 잘 빠지는 모래로 된 토양에서 가장 잘 자란다. 연강우량은 1,000∼1,500mm가 필요하며, 강우량의 80% 이상이 면모신장기까지 내린다. 성숙기와 수확기에는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좋다. 개화기에 비가 많으면 낙화와 낙뢰(落쨘)·낙삭(落殼)이 많으며, 가 부족해도 낙삭이 많이 발생한다.

목화는 잘록병·모무늬병·탄저병 등의 병해와, 목화바구미··목화다래나방 등에 의한 충해가 발생한다. 탄저병 발병지는 1년 동안 다른 작물을 재배한다.

목화는 면사·면직물·혼방직물·그물로서의 용도 이외에, 이불솜·옷솜·탈지면 등의 제면용, 면화약· 등의 공업원료로 이용한다. 종자에서 기름을 짜서 ·의 대용품을 만들고, ·의 원료로도 이용한다. 은 사료와 비료, 목화대는 연료 및 제지원료로 사용한다. 한방에서는 종실을 면실(綿實)이라 하여, 종피를 벗긴 종인(種仁)을 강장·지혈·소종(消腫) 등에 처방하고, 뿌리는 통경(通經) 등에 약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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