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유

장국유

[ 張國維 ]

요약 중국 명나라 때의 관료이자 학자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저서로 《오중수리전서(吳中水利全書)》,《명사(明史)》등이 전한다.
출생-사망 1594 ~ 1646

자는 구일(九一), 호는 옥사이고, [浙江省] 출신이다. 그는 1622년에 진사가 되어 번우 지현에 임되었고, 1628년에는 형과급사중(刑科給事中)으로 승진한 후 (魏忠賢)을 중심으로 한 환관파를 적극 비판하고 시정오사(時政五事)를 조정에 올렸다. 이에 예과도급사(禮科都給事)에 발탁되고, 태상소경(太常少卿)으로 자리를 옮겼다. 1634년에는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로 승진한 후 응천(應天)·안경(安慶) (巡撫)를 지냈다.

관직에 재임하는 동안 소주구리석당(蘇州九里石塘)·평망내외당(平望內外塘)·장주지화당(長洲至和塘) 등의 수리공정을 수축(修築)했고, [松江]의 바닷물을 막는 제방을 수리했으며, 전장[鎭江[과 [江陰]의 조거(漕渠)를 준설했다. 그는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공부우시랑총리하도(工部右侍郞總理河道)에 임명되었으며, 1641년에는 병부우시랑겸회서임통사진병(兵部右侍郞兼淮徐臨通四鎭兵), 얼마 후에는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임명되었다.

그 뒤 전쟁에 패해 관직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다행히 그 간의 치하(治河) 업적을 인정받아 관직을 회복해 다시 저장성에서 연병(練兵)과 물자조달을 감독했다. 명나라가 망한 후, 복왕(福王)이 불러 군무(軍務)를 맡겼으나 마사영(馬士英)과 의견이 맞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가길 청했다. 그러나 노왕(魯王)이 그를 병부상서·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에 임명하였다. 1646년 물에 빠져 죽었다.       

저서로 《오중수리전서(吳中水利全書)》 《충문공유문(忠文公遺文)》 《무오소초(撫吳疏草)》 등이 있으며, 《명사(明史)》 《명사고(明史稿)》 《명인소전(明人小傳)》 등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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