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소르지멘토의 대오스트리아전쟁

리소르지멘토의 대오스트리아전쟁

1848년 1월 시칠리아에서 헌법제정을 요구하는 혁명이 일어나, 각지로 크게 파급되었다. 그 결과 시칠리아·토스카나·교회국가·피에몬테에서 헌법이 제정되었다. 한편, 파리의 2월혁명, 빈의 이 일어남으로써 양국 정부는 이탈리아에 개입할 수 없게 되었다. 에서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시민 반란이 있었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王)인 카를로 알베르트는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토스카나와 정부도 이에 호응하여 제1차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교황 피우스 9세의 이반(離反)과 이탈리아 여러 나라의 분열로 결국 오스트리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따라서 카를로 알베르트는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이와 함께 그 동안에 성립하였던 로마 공화국과 토스카나 공화국도 붕괴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승리에 따라 구체제가 복귀하였고, 1848년의 헌법은 사르데냐 왕국에만 남게 되었다. 피에몬테에는 이탈리아 각지로부터의 망명자가 모이게 되어, 이탈리아의 온건자유주의 세력의 중심을 이루었다. 1850년 카부르가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이 되자, 그는 영국을 모방한 정책을 채택하는 동시에 재정 개혁에 노력하였다.

한편, 외교정책에 의한 통일의 달성을 노렸다. 또 크림전쟁(1853∼1856)에 파병하여, 사르데냐의 지위를 높이고 이탈리아 문제를 국제문제화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지지를 얻어 1859년 4월에 대(對)오스트리아전쟁을 일으켰다. 사르데냐·프랑스군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7월에는 롬바르디아의 병합에 성공하였다. 또 중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대공국(大公國) 등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이듬해 6월에 병합하였다. 이 병합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에 와 를 할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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