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소르지멘토의 통일 기운

리소르지멘토의 통일 기운

18세기 말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혁명의 영향 아래 몇 개의 혁명적 그룹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자력으로 혁명을 실현할 힘은 가지지 못하였고, 나폴레옹의 정복에 의하여 봉건제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도 철저하지 못하여 구체제가 부활되어, 북·중부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지배, 남부에서는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후 19세기에 들어서자 리소르지멘토의 출발점이 된 일련의 운동이 일어났다. 즉, 중남부에서는 카르보나리당(숯장이라는 뜻), 북부의 피에몬테에서는 페데라티당(盟約者라는 뜻)이라는 비밀결사가 1820∼1821년 와 피에몬테에서 혁명을 일으켰고, 1831년에는 ··에서도 카르보나리당의 반란이 있었다. 또, 1833년~1845년에는 (共和制)의 실현에 의한 이탈리아 민족의 재생이라는 기치를 내건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당(黨)’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혁명과 반란의 기운은 모두 실패로 끝났으나, 카르보나리당과 마치니의 물결은 리소르지멘토에 있어서 민주주의파라고 할 수 있다. 도시의 급진적 를 기반으로 하였다. 그 후 1840년대에는 온건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지와 개화적(開化的)인 귀족들로 구성된 자유주의파가 대두하였다. 이들은 이탈리아 여러 나라의 연방화에 의한 통일의 달성과 외국세력의 배제를 목표로 하였다. 1846년 자유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교황 피우스 9세가 즉위한 것이 이들 자유주의파에게 희망을 주게 되어 네오겔프주의가 성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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