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수리의 역사

농업수리의 역사

농업수리사업의 역사는 농업의 기원과 때를 같이한다. 중국에서는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대규모의 인공적 관개시설을 하였다. 이집트는 나일강의 물을 다스려 농경에 이용하였다.

한국에서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관개사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138년(신라 일성왕 11)에 전국에 제방을 쌓도록 하는 명령이 시달되었다. 330년(흘해왕 21)에는 지금의 전북 김제시에 벽골제(碧骨堤)가 축조되었으며, 현재 그 유적으로 석주(石柱)·수문(水門) 등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1170년(의종 24)에 황해도 연백에 있는 남대지(南大池)를 개축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15년(태종 15)에 벽골제를 수축하고, 1476년(성종 7)에는 전국 각도에 있는 언제(堰堤)를 수축하였다. 1643년(인조 21)에는 김자점(金自點)이 황해도 봉산군에 어지둔보(於之屯洑)를 축조하여 약 500정보의 논을 관개하고, 경기 장호원에 김자점보를 축조하여 논을 관개하였다. 또한 1649년(효종 1)에는 수차(水車)를 제작하여 관개하는 데 사용하였고, 1799년(정조 23)에는 경기 수원시에 축만제(祝萬堤)를 축조하여 관개에 사용하였다. 그후 개수를 거듭하다가 현재는 주변이 서호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1729년(영조 5) 당시의 대소 언제의 수는 3,575개소에 달하였으며, 1781년(정조 5)에도 3,378개소, 그리고 1909년의 농공상부(農工商部) 발표에 의하면 대소 언제수는 2,781개소였다. 조선 태조(太祖) 때에 권농관(勸農官)을 임명하여 언제의 수축을 감독하게 하였고, 1662년(현종 3)에는 임진왜란을 겪던 당시 폐지되었던 제언사(堤堰司)를 다시 설치하여 각 도의 제언사업을 관장하게 하였다. 1778년(정조 2)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을 작성하여 각 도에 나누어 주고 그 유지·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하였다. 

그후 일제강점기 때의 수리사업은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1906~19년이며 수리조합조례·국유미간지 이용법 등이 실시되었다. 기존시설의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저수지 6,300개소, 보(洑) 20만 7000개소에 대한 농업수리면적은 23만 정보였다. 또 수리조합 15개소를 설치하고 저수지와 보의 개수·보수를 실시하였다.

제2기는 1920~39년으로, 일본 본토를 공업화하고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한국의 농업에서 증산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른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세웠다. 그래서 토지개량·수리조합령 등을 공포하여, 조선토지개량 주식회사와 동양척식회사[東拓]를 설립하는 동시에 173개의 수리조합을 설치하였다. 또한 장래 토지개량사업을 실시할 수 있는 지구의 조사를 시행하였다.

제3기는 1940년부터 1945년 8·15광복까지인데, 전쟁중 군량미를 조달할 목적으로 농지개발영단까지 설립하고 수리사업을 강행하였다. 일제강점기 36년간에 남북한을 통하여 598개의 수리조합을 설립하였는데, 그 농업수리면적은 35만 6700정보였다. 8·15광복 후 정치·사회의 혼란으로 수리사업은 일시 정체(停滯)되었으나, 미국의 원조로 다시 착수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다시 중단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 후 농지개혁특별회계법(農地改革特別會計法)의 공포 실시로 받게 된 농지상환금액(農地償還金額) 및 미국의 원조 등으로 수리사업은 다시 추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