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정

박차정

[ 朴次貞 ]

요약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조선청년동맹과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신간회(新幹會) 동래지회 회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 반일학생운동으로 확대되도록 기여했으며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해 부녀자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대동단결을 주도하였다.
박차정의사 생가

박차정의사 생가

출생-사망 1910.5.7 ~ 1944.5.27
국적 한국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부산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95)

부산 동래(東萊) 출신으로, 15세 때부터 조선소년동맹(朝鮮少年同盟)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25년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에 입학해 조선청년동맹과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동래 조합원, (新幹會) 동래지회 회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조사연구부장·상무위원·선전부장·출판부장 등을 맡아 여성 항일운동에 이바지하는 한편, 그해 12월 근우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전국적 반일학생운동으로 확대시키다 일본 경찰에 되었다.

이듬해 1월 부산방직 파업사건을 주도하다 다시 체포되었으나 병으로 풀려난 후, 중국 [北京]으로 건너가 (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과 결혼해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에는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설립한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임명되어 사관생도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뒤 (民族革命黨) 부녀부 주임을 거쳐, 1936년 7월 이성실(李聖實)과 함께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해 부녀자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대동단결을 주도하였고, 다음해 11월에는 의열단 한중민족연합전선의 대(對) 일본 라디오 선전방송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8년 의열단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에 글을 투고해 무장궐기를 촉구하고, 그해 10월부터 (朝鮮義勇隊) 부녀복무단 단장을 맡아 항일 투쟁에 주력하였다. 이듬해 2월 [江蘇省] [崑崙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4년 5월 사망하였다. 1995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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