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횡책

연횡책

[ 連衡策 ]

요약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 장의(張儀)가 내세운 외교정책.

의 전국시대는 각국이 생존을 해 치열하게 싸워야 했기 때문에 일국의 힘으로는 생존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각국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합하고 갈라섰다. 연횡책과 합종책(合從策)도 이런 상황에서 나온 일종의 외교정책이었다. 전국 6국이 진과 화친하여 공존을 주장 연횡책은 장의가 주장한 외교정책이었다. 진나라가 시한 연횡책은 전국시대 각국간의 복잡한 역관계의 산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라의 쇠퇴가 연횡책을 탄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BC 312년 초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초나라는 진나라에 패하여 한중(漢中)지방을 진에게 빼앗겼다. 이때 제(齊)나라가 다시 합종을 제의하여 초나라도 진나라에 복수할 기회로 생각하여 합종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때 진나라는 초에 통혼(通婚)을 청하여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초의 합종 참여를 방해했다. 제·위(魏)·한(韓)은 초의 배신에 격분하여 초나라를 정벌했으나, 초나라는 진나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진나라는 다시 진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초의 태자가 진나라 를 죽인 것을 트집잡아  제·위·한과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했다. 얼마 후 진나라는 다시 갑자기 초나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화친을 청했다. 그리고 진·초의 국경에 위치한 무관(武關)에서 회맹(會盟)을 청했다. 초나라 회왕(懷王)은 부득이 회맹에 참석하러 가다 진나라 복병에게 사로잡혀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으로 압송되었다. 그뒤 초나라 회왕은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진나라에서 병으로 죽었다. 초는 이에 따라 국력이 쇠퇴했다. 진나라는 이 틈을 타 장의를 내세워 연횡책을 주장했다.

연횡책을 표방한 장의의 육국유세(六國遊說)는 한때 크게 효과를 거두어 6국이 진나라에 성의를 보이고 친선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때 진나라에서는 혜왕(惠王)이 죽고 무왕(武王)이 즉위했다. 그런데 장의가 무왕과 불화하여 위나라로 망명하자 연횡책은 흐지부지되고, 6국은 다시 진나라에 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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