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운동

복사운동

[ 復社運動 ]

요약 중국 명말(明末) 재야세력의 정치운동.

말 재야의 정치운동인 복사(復社)는 처음 오강지현(吳江知縣) 웅개원(熊開元)의 지지를 얻어 손순(孫淳)·오증을 중심으로 한 몇몇 사람이 창설하였다. 복사는 창설 당시 사의 장인 양정추가 사의 설립 이래 실무를 맡았던 손순의 주도에 불만을 품어 위기를 맞았으나, 장부가 이를 중재하고 응사가 복사에 합류함으로써 양사의 병합이 이루어졌다.

전국적인 통일조직을 갖춘 복사는 윤산(尹山)에서 제1회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湖北省]·허난성[河南省]·[安徽省] 등지에서 온 700여 명이 참가했으며,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은 문장을 우송해 와 모두 2,500여 수에 이르는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윤산대회가 복사의 통합된 모습을 보였으나, 그 조직이 반드시 단일의 통합체는 아니었다. 각지의 문단을 대표하고 있는 송강(松江)의 기사(幾社), 중강(中江)의 단사(端社), 무림(武林)의 독서사(讀書社) 등이 모두 복사에 통합되었지만, 독자적인 활동을 계속하는 문사도 있었다.

복사란 이름은 응사의 ‘존경복고’의 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원래 역(易)의 (卦) 이름인 복은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옛날로 복귀한다는 뜻이다. 응사가 목표로 한 것은 에 의거한 복고였으나, 복사의 복은 경전을 포함한 ‘학술의 부흥’이라고 하는 보다 포괄적인 복고를 의미한다.

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하층신사 또는 에 급제하지 못한 생원층이었다. 명말의 동림당(東林黨)과 비교해 보면, 동림이 대신급을 포함한 중견관료층이었던 반면에 복사는 그렇지 못했다. 원래 문사는 팔고의 평선기관이었기 때문에 한 관료보다는 과거를 목표로 한 생원층이 많았다. 따라서 복사 동인들이 전개한 운동도 동림당 인사와는 다른 각도에서 전개하였다. 그들은 중앙관료나 지방관료에 대한 비판은 물론 서민을 위한 저작활동, 농민이나 상공인의 반환관투쟁에도 공동보조하였다. 이러한 복사운동은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반청(反淸)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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