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춘추

[ 春秋 ]

요약 기원전 5세기 초에 공자(孔子)가 엮은 것으로 알려진 중국의 사서(史書).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의 은공(隱公) 원년(元年, BC 722년)부터 애공(哀公) 14년(BC 481년)까지의 사적(事跡)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유학(儒學)에서 오경(五經)의 하나로 여겨진다.

《춘추(春秋)》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魯)의 은공(隱公) 원년(元年, BC 722년)에서 애공(哀公) 14년(BC 481년)까지 12대(代) 242년 동안의 역사(歷史)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5세기 에 공자(孔子, BC 552~BC 479)가 노(魯)에 전해지던 사관(史官)의 기록을 직접 편수(編修)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학(儒學)에서 오경(五經)의 하나로 여겨지며, 동주(東周) 시대의 전반기를 춘추시대(春秋時代)라고 부르는 것도 이 책의 명칭에서 비롯되었다.

공자(孔子)가 편수(編修)하기 이전에 이미 노(魯)에는 《춘추(春秋)》라고 불리는 사관(史官)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다. 《(孟子)》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열국(列國)들이 각각 사관(史官)을 두어 사적(事跡)을 정리했는데, 진(晉)에는 ‘승(乘)’, 초(楚)에는 ‘도올(檮杌)’, 노(魯)에는 ‘춘추(春秋)’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노(魯)에 전해지던 기록을 공자(孔子)가 스스로의 역사 의식과 가치관에 따라 새롭게 편수(編修)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오늘날의 《춘추(春秋)》이다.

(司馬遷, BC 145?~BC 86?)의 《(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편(篇)에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으니 그럼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는가. 이에 공자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 … 공자는 지난날 소송안건을 심리하였을 때에도 글의 표현[文辭]을, 다른 사람과 의논해야 할 때에는 결코 자기 혼자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를 지을 때에는 결단코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였기 때문에 (子夏)와 같은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 수가 없었다. 제자들이 《춘추》의 뜻을 전수받은 뒤, 공자는 말하였다.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춘추》 때문일 것이다.”

《춘추(春秋)》는 1800여 조(條)의 내용이 1만 6500여 자(字)로 이루어져 있어 간결한 서술을 특징으로 한다. 공자는 사실을 간략히 기록했을 뿐 비평이나 설명은 철저히 삼갔는데, 직분(職分)을 바로잡는 정명(正名)과 엄격히 선악(善惡)을 판별하는 포폄(褒貶)의 원칙에 따라 용어를 철저히 구별하여 서술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었을 때도 대상이나 명분에 따라 ‘시(弑)’와 ‘살(殺)’을 구분하였으며, 다른 나라를 쳐들어갔을 때도 ‘침(侵)’, ‘벌(伐)’, ‘입(入)’, ‘취(取)’ 등의 표현을 구분해 사용했다. 이처럼 공자(孔子)는 《춘추(春秋)》에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밝혀 그것으로써 천하의 질서를 바로세우려 하였다. 이로부터 명분(名分)에 따라 준엄하게 기록하는 것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춘추》는 노(魯)의 역사를 중심으로 삼고, 주(周)를 종주(宗主)로 하고 은(殷)의 제도를 참작하여 하(夏), 상(商), 주(周) 3대의 법률을 계승하고 있다. 그 문사(文辭)는 간략하지만 제시하고자 하는 뜻은 넓다. 그래서 오(吳)와 초(楚)의 군주가 왕을 자칭하였지만 《춘추》에서는 그것을 낮추어 본래의 작위(爵位)인 자작(子爵)으로 칭하였다. 천토(踐土)의 회맹(會盟)은 실제로는 제후(諸侯)가 주(周)의 천자(天子)를 부른 것이지만 《춘추》에서는 그 사실을 피해서, ‘천자가 하양(河陽)으로 수렵을 나갔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런 사안들을 들어서 당세(當世)의 법통을 바로잡는 기준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제후들에 대한 폄손(貶損)의 뜻은 후에 군주가 될 사람들이 이를 참고하여 실행하게 하는 데 있다. 《춘추》의 대의가 행해지게 되면 곧 천하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맹자(孟子)는 “옳지 못한 설(說)과 포악한 행동이 행해지고,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고,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죽이는 자가 있어 공자가 이런 세태를 두려워해 《춘추》를 지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춘추》는 명분(名分)에 따라 용어들을 엄격히 구별하여 서술하였고, 내용이 매우 간단하게 기록되어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이 이해를 돕고자 그 의미를 해석하고 풀이하는 주석서(註釋書)인 ‘전(傳)’을 지어 ‘춘추학(春秋學)’이 생겼다. (班固, 32~92)의 《(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춘추》에 대한 전(傳)이 모두 23가(家) 948편(篇)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公羊高)가 지은 《공양전(公羊傳)》, 곡량숙(穀梁俶, 穀梁赤이라고도 함)의 《곡량전(穀梁傳)》, 좌구명(左丘明)의 《좌씨전(左氏傳)》을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 한다.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은 경문(經文) 해석 중심이고, 《좌씨전(左氏傳)》은 《춘추》에 기록된 사실(史實)에 대한 역사적 실증적 해석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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