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부치 게이조

오부치 게이조

[ Obuchi Keizo , 小渕恵三(소연혜삼) ]

요약 일본의 정치가. 1998년 7월, 제85대 총리로 지명되었다. 총리 재임 기간 중 일본의 금융불안을 해소시키고, 경제회생의 가닥을 잡는 한편, 자유·공명당과의 보수대연합을 통해 치안·안보 관련 분야를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어명 おぶちけいぞう
출생-사망 1937.6.25 ~ 2000.5.14
국적 일본
활동분야 정치

군마현[群馬縣]에서 출생하였다. 1958년 [早稻田大學]에 입학하여 동대학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63년, 중의원 의원이었던 아버지 오부치고헤이[小淵光平]의 사망으로 실시된 참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첫 당선되었다. 그후 12차례나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1970년 우정성 정무차관, 1972년 건설성 정무차관을 거쳐, 1979년 제1차 오히라[大平] 내각에서 총리부 총무장관 겸 오키나와[沖繩] 개발청장관이 되었다. 1985년 다케시타파[竹下派]의 소세이카이[創政會] 결성에 참가했고, 1987년 다케시타파의 게이세이카이[經世會] 사무총장이 되었다.

같은 해, 타케시타 내각이 발족되면서 관방장관으로 취임하여, 1991년 가이후[海部] 내각에서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하였다. 1992년 10월 카네마루[金丸]가 오직사건(汚職事件)으로 의원직을 사직한 후 게이세이카이의 회장이 되었다. 1994년 7월 무라야마[村山] 내각에서 자민당 부총재가 되고, 1997년 9월 제2차 하시모토[橋本]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취임했다.

1998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하시모토 내각이 퇴진한 후 제85대 총리로 지명되었다. 그 후 1년 8개월 동안의 총리 재임 기간 중 일본의 금융불안을 해소시키고, 경제회생의 가닥을 잡는 한편, 자유·공명당과의 보수대연합을 통해 치안·안보 관련 분야를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변국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자위대를 파견할 수 있도록 한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 라인)" 관련법의 개정, 조직폭력배를 단속하기 위한 통신감청법의 제정, 국기·국가법의 성립, 헌법조사회 설치는 보수대연합의 산물이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중국의 과거사 공세로 시작된 우경화의 흐름을 적절히 이용한 성과였다.

오부치는 소탈한 성격이어서 그의 별명과 그에 관한 많은 농담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 만큼 서민적인 정치가로서의 인기를 누렸다. "부치폰"이라는 유행어를 낳은 "오부치입니다" 로 시작되는 그의 전화를 받은 일반시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2000년 4월 1일 로 인한 으로 쓰러진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5월 14일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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