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파운동

고려파운동

[ 高麗派運動 ]

요약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중심이 되던 출옥 성도들이 예장고려라는 새로운 장로교를 일으킨 운동.

과 함께 출옥한 성도들이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 집에 모였다. 당시 에 항거하다가 옥중에서 순교한 성도만 50여 명이나 되었다. 출옥 성도 중에는 기성교회 조직을 버리고 전국 각지에서 재건운동을 벌여 재건교회를 설립한 사람들도 있고, , 주남선 목사 등은 출신지인 경남노회로 내려와 나름대로의 회개, 경건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별도의 신학교를 세워 보수 근본주의에 입각한 교역자 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고려신학교이다.

한편 경남노회에서 일제 말기 교회를 유지해오던 교역자들에 대한 징계 여부를 놓고 맞서다가 분열되었는데, 경남노회와 경남법통노회(고려측)로 양립하였다. 이와 같은 경남노회 분규와 고려신학교의 총회에서의 위상문제, 메첸파 들과의 관계문제 등으로 장로교 총회는 분열에 휘말렸다. 한상동 목사측은 총회의 고려파 불인정 처리와 때맞춰 1952년 9월 경남총노회를 조직하였다.

그후 1960년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 이후 합동측과 통합하였으나 입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1962년에 다시 분리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에 재단 분규가 고조되어 반고소 고려파라는 분파가 분열해 나가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려신학교 교수들이 낸 논문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문제〉가 신자간의 불신 법정 고소가 옳다고 하여 《고린도전서》 6장 1∼11절을 위배한 사실이 발단이 되었다.

1974년 고신 총회는 신자간의 불신 법정 고소가 가능하다고 가결함으로써 빚어진 신학적인 변질(교리)과 생활의 불순(교회의 행정)을 항의한 것이 발단되어 반고소 고려측 총회가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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