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은 위클리프 때부터 로마 교황의 세력권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이 있었는데, 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완전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이혼문제에는 국왕의 개인적 사정뿐만 아니라 내외의 정치적 ·종교적 정세가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그리하여 1534년의 ‘수장령(首長令)’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관리자로 하는 독립된 교회가 되었는데, 그 교의 내용은 여전히 가톨릭적이었다.

다음의 시대에 들어서자 개혁정책이 단행되어 교회는 현저하게 칼뱅주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메리의 치하에는 다시 가톨릭교회에 대한 복귀정책이 취해져 많은 목사와 신도들이 박해를 받았다.

이같이 영국은 국왕이 바뀔 때마다 그 교회체제에도 크게 변동이 있어 오다가, 치하에 국운이 융성해지면서 일단 안정을 되찾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중간입장인 중도적 방향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철저하지 못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장로주의(長老主義)의 스코틀랜드에서 를 맞이하여 보다 철저한 개혁의 실시를 청원하였으나 이들의 희망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탄압을 받았다.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었던 개혁에 대한 기대는 잉글랜드 대 스코틀랜드의 전쟁을 계기로 촉발하여, 드디어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을 정점으로 하는 청교도혁명에 이르렀다. 이 혁명은 크롬웰의 주도하에 수습되었으나 이 혁명을 계기로 해서 많은 프로테스탄트파가 생겼다. 오늘날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 청교도혁명으로 생긴 여러 파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참조항목

, ,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