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

보상

[ 褓商 ]

요약 옷감·화장품·세공품 등 일용 잡화를 보따리에 싸서 지고 다니면서 파는 전문적인 장수.

지방의 일정한 장소에서, 대개 5일마다 열리는 시장인 장시를 순회하면서 농민·수공업자·상인 등과 소비자 사이의 물물교환을 중재하였는데, 일용잡화들을 보따리에 싸서 질빵에 걸머지거나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는 상인을 보상(봇짐장수)라 불렀다.

이들은 일정한 지역마다 단을 이루어 동업 조합 같은 조직체를 만들었는데, 언제부터 조직했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확고한 조직을 가진 것은 대체로 조선 중기 이후로 추정된다.

1879년(고종 16) 발표된 〈한성부완문(漢城府完文)〉에는, 지역마다 보상단이 있고, 각기 정해진 규율에 따라 접장(接長)이 통솔하였으며 한성부에서 전국8도 접장의 우두머리인 도접장을 뽑아 일종의 신분증인 도서(검표)를 발급하여 보상의 신분을 보장해 줌으로써 무뢰한이나 지방관속 들에 의한 폐해를 막고 상권을 확립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상단은 등짐장수의 행상단인 부상단(負商團)과는 따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1883년(고종 21)에 정부에 을 설치하여 하나로 합쳐 단일화하였다. 1885년 해상국을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함과 동시에 보상들을 우단(右團)으로, 부상들을 좌단(左團)으로 개편하였으나 임원만은 그대로 하나로 두었다.

그 뒤 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로, 다시 로, 이속되었다가 1899년 또다시 상무사(商務社)로 이속되면서 우단은 우사(右社)로, 좌단은 좌사(左社)로 개칭하였다. 1903년에 공제소(共濟所)로 이관되어 서울 사동(寺洞:인사동)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하다가 다시 상민회(商民會)로, 1904년에는 진명회(進明會)로 이관되었고, 같은해 공진회(共進會)로 이관하여 회장 이준(李儁)과 총무 나유석(羅裕錫)이 통솔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부보상 말살정책에 따라 거의 다 없어지고, 모시를 생산하는 충남 부여·한산 등 8읍(邑)을 중심으로 한 보상단인 상무사우사(商務社右社)와 예산·덕산을 중심으로 하는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가 있다.

보상단은 부상단과 함께 국가 유사시에 동원되어 정치적 활약을 하였다. 1866년 때는 동원되어, 프랑스군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부보상 1,000여 명이 동원되어 관군과 함께 동학군과 격전을 벌인 일도 있었으며, 군대 동원을 못하게 된 정부가 1898년(광무 2)에 조직한 황국협회의 부보상을 동원하여 독립협회의 를 습격하게 하는 등 정권을 보호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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