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산맥의 등산사와 탐험사

히말라야산맥의 등산사와 탐험사

히말라야에 관한 지식이 처음으로 유럽에 알려진 것은 BC 329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중앙아시아로부터 히말라야에 접근한 데서 비롯된다. BC 139년에는 중국 한(漢)나라 (武帝)의 사절이 된 (張騫)이 파미르를 넘어 아프가니스탄까지 들어갔다. 그 후 법현(法顯)·송운(宋雲)·현장(玄奘) 등의 승려들이 불전을 구하기 위하여 히말라야의 험로를 넘어 인도를 방문, 새로운 지식을 가져왔다.

히말라야를 처음으로 넘은 유럽인은 포르투갈 의 안토니오 데 안도라데 신부와 일행 2명으로, 1624년 가르왈히말라야의 마나 고개(5,600m)를 넘어 티베트로 향하였다. 같은 무렵에 2명의 예수회 수사가 아삼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로 들어갔다. 1715년에는 이탈리아의 신부 이폴리토 데시데리가 카라코람을 거쳐 티베트를 횡단, [拉薩]를 방문하였다. 1774년 조지 보글은 동인도회사로부터 티베트의 시가체로 파견되었고, 1783년에는 새뮤얼 터너가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19세기가 되자 마침내 인도 측량국의 영국인 측량관이나 현지 고용인들에 의한 조사가 빈번해져 히말라야의 탐험이 본격화되었다. 1840년대에 영국의 스트레이치와 커닝엄에 의해 티베트 국경지역의 탐사가 있은 후, 1848∼1850년 식물학자 후커가 네팔 동부와 시킴 지방을 조사하였다. 1855∼1858년에는 독일의 슐라긴트바이트 삼형제가 시험삼아 가르왈히말라야의 아비가민을 약 6,800m까지 오름으로써 당시의 신기록을 세웠다.

1860년에는 인도 측량국 현지인이 펀자브히말라야의 시루라(6,500m) 정상에 오른 기록이 있다. 1866년 고드윈 오스턴이 카라코람의 발토로 빙하지역을 탐험하였다. 1865년 이후 약 20년 동안, 인도 측량국은 현지인 측량관(펀디트)을 티베트 남부로 진입시켜 지도 제작에 종사하게 하면서 티베트의 내부 사정도 비밀리에 조사하도록 하였다. 후자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는 인도의 티베트 학자 사라트, 찬드라, 다스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가 히말라야 탐험시대 초기에 활약한 사람들이다.

근대적 히말라야 등반의 여명은 1883년 그레이엄에 의한 두나기리 시험 등반, 시킴의 카브루 주변 등반에서 시작되었다. 1887년 영허즈번드가 북쪽에서 무즈타그 고개를 거쳐 카라코람을 넘는 데 성공하였고, 1892년에는 카라코람 원정에 나선 콘웨이가 6,888m까지 올라가 당시의 신기록을 세웠다. 1895년 낭가파르바트산(8,125m)에 도전한 A.F.머머리는 조난을 당하였고, 1899년 프레시필드에 의한 칸첸중가산 정찰과 일주 여행으로 19세기 히말라야 등반사는 끝났다.

20세기에 들어서자 1907년에 가르왈히말라야의 트리술(7,120m)이 론스탭에 의하여 처음으로 정복되었다. 이것은 인류가 7,000m에 올라선 최초의 기록이었다. 다시 영국의 케라스는 1911년 7,000m인 파운프리에 올랐다. 1909년 이탈리아의 아브루치공(公)이 이끄는 대규모 원정대가 카라코람으로 들어가 K2봉 등정에 실패한 후, 초고리자에 도전, 7,500m 근처까지 올라가 기록을 경신하였다. 1899~1912년 미국의 워크맨 내외가 7차례에 걸쳐 카라코람 주변을 탐색하였는데, 워크맨 부인은 1906년 눈쿤 산군(山群)의 피나클피크(6,930m)에 처음으로 올라 여성 등반의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7,000m급은 불과 3개밖에 정복하지 못하였다.

으로 중단된 히말라야 등반은 대전이 끝나자 다시 활발해졌다. 1921년 영국은 최초의 에베레스트 정찰대를 파견한 이래, 1938년까지 모두 7회 도전하여 1933년에는 약 8,572m까지 도달하였다. 칸첸중가산은 1929년과 1931년에 독일 등반대가, K2봉은 1938년과 1939년에 미국 등반대가 8,000m 부근까지 올랐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낭가파르바트산은 1932~1939년에 5차례에 걸쳐 독일·오스트리아 등산대가 도전하였으나 희생자만 냈을 뿐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6년 히든피크(8,068m)를 겨냥하였던 프랑스 등반대도 도전에 실패함으로써 8,000m봉은 하나도 등반하지 못했다. 한편 7,000m급에서는 1931년에 영국 등반대가 카메트에, 1936년에 틸만 등반대가 난다데비산에 올라 활기를 띠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중단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때까지 철저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고수해 왔던 네팔이 문호를 개방하게 되자, 1950년 네팔로 들어간 프랑스 등반대는 단 한 차례의 도전으로 안나푸르나산을 정복, 인류 최초로 8,000m급 등반에 성공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1953년에 세계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이 영국 등반대에 의해 마침내 함락되었고, 같은 해 낭가파르바트산도 독일·오스트리아대(隊)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하나도 오르지 못했던 16개의 8,000m봉이 차례로 정복되어, 1964년에는 티베트의 고사인탄산(8,013m)마저 중국 등반대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이로써 히말라야의 신비시대는 사라지고 100개가 넘는 7,000m봉도 오를 만한 것은 모두 정복되어 새로운 처녀봉은 지도에서 찾기 어렵게 되었다. 한국의 등반대도 1995년 7월 브로드봉(8,047m)을 정복함으로써 8,000m급 중 14개 봉우리를 정복하였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루트 개척, 특히 카라비너·· 등을 사용하는 인공 등반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또한 스키를 이용한 오락·스포츠화, 산기슭을 걷는 과 같은 관광화로 대중화되어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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