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화장

고려시대의 화장

삼국시대에는 화장품 제조기술이 뛰어나 일본과 중국에 그 기술을 전하였고, 화장기술 역시 고도의 수준에 도달했었다. 화장뿐 아니라 옷 ·장신구 등 모든 생활이 사치에 흘러, 고려시대의 정치가들 사이에서는 신라의 패망이 사치풍조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사치금압(奢侈禁壓)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신라의 정치 ·경제 ·군사제도를 거의 그대로 답습한 데다가 문화와 생활관습마저 계승하였으므로 신라의 화장경향 역시 계승 ·진보하였다. 고려인의 화장을 중국측의 기록으로 추측해 보면, ‘부인은 귀밑머리를 오른쪽 어깨에 내려 드리우고 나머지 머리는 아래로 내려 댕기로 매고 비녀를 꽂았다’(《宋史》)고 하였으며, ‘짙은 화장을 즐기지 않아 분은 사용하나 연지를 사용하지 않았으며(不喜塗澤 施粉無朱), 버드나무 잎같이 가늘고 아름다운 눈썹을 그렸다. 또한 비단향료주머니를 차고 다닌다’(《高麗圖經》)고 했는데, 이들 기록만으로 고찰한다면 고려인의 화장이 담장(淡粧)에 그쳤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현은 이 기록자들이 송(宋)나라 사람들이기 때문에 매우 짙은 화장을 했던 송나라 여인들보다 엷다고 표현한 것뿐이다. 고려인들의 화장이 결코 엷었거나 연지를 사용하지 않았을 리 없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짙은 화장을 금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佛家 八戒齊 중에 不著華瓔洛 不香塗身 不著香董衣 등의 조항이 있다). 또, 고려시대 초에 제도화된 기생(妓生) 중심으로 짙은 화장, 즉 분대화장(粉黛化粧)이 성행하였다. 분대화장은 반지르한 머리, 눈썹과 연지화장 외에 백분을 많이 펴 바른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짙은 화장이었는데, 기생을 분대라고 부를 만큼 기생의 상징적인 치장이었다.

분대화장 역시 평면화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생들의 직업적인 의식화장이 조선시대에까지 계승되고 여염집 여성들은 엷은 화장을 고수하여 고려시대부터 화장경향이 2원화되고, 기생들의 분대화장으로 인하여 화장을 경멸하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향을 애용한 나머지 조정향(助情香)을 먹기까지 하였는데, 기생들이 특히 그러하였다. 고려가요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가 그러한 예로, 향을 먹은 기생의 노래이다. 이처럼 기생들의 분대화장은 화장에 대한 기피성향 ·경멸감을 발생시킨 반면에 화장의 보급과 화장품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기생양성소인 (敎坊)에서 기생들에게 화장법을 가르치고, 이들이 사용할 화장품을 지급하였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수은(水銀)을 수입하여 거울을 만들게 하고 빗도 만들게 하였다(宮中에 鏡匠, 梳匠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후기에는 치졸하나마 도 유행했던 것 같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의하면, “백발에 화냥노는 년이……센(흰)머리에 흑칠하고……과그른 소나기에 흰 동정 검어지고 검던 머리 다 희거다.…”란 (俗謠)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화장수준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으로 각종 화장도구와 화장품 용기가 있다.

삼국시대의 화장용기는 주로 토기 ·목제로서 파손되기 쉬워 남아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으나 고려시대에는 금 ·은 ·청동 등 금속제 외에 청자로 대량 제조되어, 화려하고 견고한 화장품 그릇이 많이 남아 있다. 유병 ·향수병 및 연지합 ·분합 등이 대표적인 것들인데, 특히 화장합[粧匳]인 청자상감모자합(靑瓷象嵌母子盒)은 신라의 토기화장합(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을 발전시킨 것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높다. 뿐만 아니라 청자 ·백자 등의 화장품 용기는 화장품의 안전도를 고려할 때 어떤 재질(材質)의 용기보다 가장 적합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화장수준이 높고 관심이 높았던 사실은 삼국시대, 조선시대보다 고려시대에 청동거울이 가장 많이, 그리고 정교하게 제조된 사실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이와 같은 고려시대의 화장문화는 중국 특히 원(元)나라에 크게 전파되었으리라 믿어진다. 고려와 원은 왕실끼리의 혼인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우위(優位)였던 고려의 문화가 대량으로 원에 전파되어 (高麗樣:고려풍속)의 유행을 이루기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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