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화장

삼국시대의 화장

삼국시대부터는 당시의 화장과 화장품을 살필 만한 기록과 유물이 뚜렷한 편인데, 예를 들면 의 고분 벽화가 그중의 하나이다. 수산리와 쌍영총 고분 벽화에서 고구려인의 화장을 추출하면, 수산리 벽화의 주인공은 귀부인이고, 쌍영총 벽화의 주인공은 여관(女官) 또는 시녀로 보이는 데도 모두 머리를 곱게 빗고, 눈썹을 짧고 뭉툭하게 다듬었으며, 뺨에 연지화장을 하고 있다.

또한 무인(舞人)들은 머리카락을 뒤로 틀고 연지를 이마에 바르고 금당(金璫)으로 머리를 꾸몄으니(《三國史記》 志一樂) 신분 ·빈부의 구별이 없이 치장에 열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들의 화장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나 일본측 사서(史書) 및 《(三才圖會)》에 일본이 백제로부터 화장품 제조기술과 화장법을 배워 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진보된 화장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백제인들이 엷은 화장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고도의 화장기술의 표현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인들은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靈肉一致思想)에서 남성인 화랑(花郞)들도 여성들 못지 않은 화장을 하고, 귀고리 ·가락지 ·팔찌 ·목걸이 등 갖가지 장신구로 장식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귀천에 관계없이 여성들이 향낭(香囊)을 차고, 귓불을 뚫어 귀고리를 달고, 장도(粧刀)를 지녔다. 또한 잇꽃으로 연지를 만들어 이마와 뺨 ·입술에 바르고, 백분(白粉) 외에 산단(山丹:백합꽃의 붉은 수술)으로 색분(色粉)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특히 692년에 한 승려가 일본에서 연분(鉛粉)을 만들어 주고 상을 받은 일이 있는데 이는 당시 신라의 화장품 제조기술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7세기경에 신라에서 이미 연분을 만들었다는 것은 세계화장품 발달사에 유례없는 대발명이었다.

신라를 비롯하여 고구려 ·백제에 4∼6세기경 불교가 전래되어 널리 신봉됨으로써 청정 ·청결이 강조되고 목욕이 대중화되었다. 목욕의 대중화는 목욕용품의 발달을 촉진시켰는데, 쌀겨 목욕으로 피부미용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서민층에서는 팥 ·녹두 ·콩껍질 등으로 만든 원시비누, 즉 조두(澡豆)를 사용한 결과 날비린내가 몸에 배어, 이를 가시게 하기 위하여 향수 ·향료를 애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측 기록(《新唐書》)에 신라 여성들이 화장을 하지 않고, 눈썹 그리기를 즐기지 않았으며, (金庾信)의 누이동생이 엷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삼국유사》)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앞서의 설명과 어긋나는 것으로 인식하기 쉬우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의 여성들이 불교의 영향으로 엷은 화장을 했으며, 평면화장에 그쳤던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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