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키등장에서 일제패망까지의 한국영화

토키등장에서 일제패망까지의 한국영화

한국영화는 1920년대 후반에 대두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경향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대응하면서 30년대 영화의 특징을 뚜렷이 부각시키게 된다. 끈질긴 사실주의와 계몽주의의 경향이 곧 그것이었다. 이규환(李圭煥)은 일본에서 영화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임자 없는 나룻배》(32)를 발표하였다. 나운규가 주연한 이 영화는 더욱 차분한 사실주의의 경지를 보여주는 가운데 한국영화를 보다 높은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이어서 방한준(方漢駿)이 감독한 《살수차(撒水車)》(35)에서도 이와 같은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한편, 저항의 불길이 내연화(內燃化)한 민족계몽주의는 안종화(安鍾和)의 《청춘의 십자로(十字路)》(34)와 《은하(銀河)에 흐르는 정열(情熱)》(35) 같은 멜로드라마조(調)의 작품 속에서도 뿌리 깊은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 심훈은 의욕적인 계몽대작 《상록수(常綠樹)》의 시나리오를 발표하였고, 그 영화화를 서두르다가 요절하였다. 나운규의 후기 활동 역시 민족계몽사상을 응결한 것이다. 그는 《아리랑》 후편(30)과 3편(36)을 만들어 삼부작(三部作)을 완성하였다.

이 밖에도 《강건너 마을》(35)과 유작(遺作) 《오몽녀(五夢女)》(37)를 발표하고 37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나운규의 유작 시나리오인 《황무지(荒蕪地)》에는 그의 후기 민족계몽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다. ‘피의 예술’에서 ‘흙의 예술’로 이어진 그의 10년에 걸친 영화작가 생활은 불멸의 것이 되었다. 《아리랑》 이후 영화계는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이 시기의 영화사와 프로덕션은 무려 40여 개에 이르는 성황을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 단명(短命)하여 한두 편의 영화제작으로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시장은 그만큼 제작자본이 영세하고 흥행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30년대 중반에 들어와 외국 영화의 수입과 흥행은 이 땅의 영화계에도 발성영화의 제작을 재촉하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군소(群小) 프로덕션을 도태시키면서 대형 제작사의 출현을 촉진시켰다. 30년대 후반에는 경성촬영소(京城撮影所) ·한양영화사(漢陽映畵社) ·고려영화사 ·조선영화주식회사 등 스튜디오와 녹음시설을 갖춘 제작사를 중심으로 영화제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發聲映畵)는 35년 이명우(李明雨)가 감독한 《춘향전》으로 경성촬영소에서 제작되었고, 녹음기술을 해결한 것은 한국영화 최초의 촬영기사인 이필우(李弼雨)였다. 《춘향전》의 제작으로 그 이후의 작품은 자연히 에서 발성영화로 전환되어 갔다.

30년대 후반에는 한국영화 제3세대(第三世代)라고 할 수 있는 일군의 신인들이 대거 등장하여 영화계의 인맥(人脈)을 더욱 풍성하게 하였다. 신경균(申敬均)의 《순정해협(純情海峽)》(37), 방한준의 《한강(漢江)》(38), 안철영(安哲永)의 《어화(漁火)》(39), 박기채(朴基彩)의 《무정(無情)》(39), 최인규(崔寅奎)의 《국경(國境)》(39), 이영춘(李英椿)의 《귀착지(歸着地)》(39) 등이 이 시기의 주요 작품들이었다.

이들 작품에는 뿌리깊은 로컬리즘과 끈질긴 계몽주의적 색채가 바닥에 깔려 있었으며, 그것은 또한 바로 이 시기 영화의 주조(主調)이기도 하였다. 40년에 들어서자 일제는 마침내 그들의 침략전을 합리화하고 전의(戰意)를 고취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영화통제령’을 공포하여, 전면적이고도 가혹한 영화통제의 의도를 노골화하였다. 그리고 42년에는 여러 제작사를 조선영화주식회사의 간판 아래 단일화시켜 이 땅의 영화는 질식상태에 빠졌다. 이 사이에 간신히 제작된 주요 작품은 최인규의 《수업료(授業料)》(40), 《집없는 천사(天使)》(41), 김유영(金幽影)의 《수선화(水仙花)》(40), 전창근(全昌根)의 《복지만리(福地萬里)》(41), 이병일(李炳逸)의 《반도(半島)의 봄》(41), 윤봉춘(尹逢春)의 《신개지(新開地)》(42) 등이었다.

일제에 의해 한국영화가 완전히 질식되기 직전에 마지막 등불처럼 나타난 이들 작품은 한결같이 겨레의 통분을 터뜨리 듯 매우 강렬한 민족의식을 짙게 담았다. 최인규의 선연한 사실주의, 김유영의 전통적인 서정의 표출, 전창근의 망명자(亡命者)들의 굳은 자활의지, 윤봉춘의 고집스러운 저항의식 등이 영상 가득히 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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