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토월회 이후 연극

한국의 토월회 이후 연극

한국연극은 각지에서 아마추어 극단들이 수백 개나 등장하여 미숙하나마 연극을 통한 민족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이러한 아마추어 연극운동은 20년대 상반기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박승희(朴勝喜)가 주도했던 토월회(土月會) 같은 극단도 당초의 출발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아마추어 단체였다. 결국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우진 같은 탁월한 연극인도 탄생할 수 있었다. 김우진은 비록 30세에 자살하고 말았지만 표현주의극(表現主義劇) 이론을 소개하고 동시에 희곡으로 실험까지 했으며 선구적인 연극이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근대적 연극정신은 30년대에 들어서 극예술연구회라는 본격적 단체를 탄생시키게 된다. 유치진(柳致眞) ·서항석(徐恒錫) 등 해외문학파 10명은 윤백남 ·홍해성 등 중진 연극인과 함께 본격적인 신극운동을 벌이기 위해 극예술연구회를 만들었고, 실제로 만 8년 동안 서양 근대극을 이 땅에 이식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유치진이 《토막(土幕)》 등 사실주의 희곡을 씀으로써 희곡문학의 기틀을 잡아놓았다. 이광래(李光來) ·함세덕(咸世德) 등의 극작가들도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30년대는 또한 최초의 연극 전용극장인 동양극장(東洋劇場)이 설립되어(1935) 유랑극단화된 신파극을 이 땅에 정착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 근대극이 대중적인 신파극과 서양 근대극을 계승한 번역극 위주의 본격 신극으로 분명하게 갈라진 시기도 바로 30년대였다.

그러나 40년대 들어와서는 연극계가 일대 혼란으로 빠져들어갔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모든 연극을 ‘’이라는 이름 아래 국책화(國策化)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일본어극을 강요하면서 모든 연극행위를 어용화(御用化)하였다. 극작가들이 어용극을 많이 쓰는 등 한마디로 암흑기였다. 30년대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저항적인 작품을 썼던 작가들도 대부분 국민연극 활동을 한 치욕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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