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한국문학

조선 후기의 한국문학

 한글 창제가 한국문학의 역사를 크게 양분하는 분수령(分水嶺)이었다고 하면, 임진왜란은 조선왕조의 역사를 크게 갈라놓은 분기점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르고 난 조선사회에는 큰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두 차례의 전쟁으로 물질적 피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신적인 타격과 충격 또한 막심하였다. 전쟁을 통하여 양반 귀족계층의 무력함을 절감한 평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현상(現狀)에 대한 비판의식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평민의 자각은 문학에도 반영되어 이윽고 평민문학의 대두와 융성을 가져오게 된다.

조선 전기의 문학이 주로 귀족적인 시가문학에 기울었던 데 대하여, 후기에는 그것이 평민들 사이에도 확산되어 시조작가의 수가 격증했을 뿐 아니라 그 내용도 매우 다양하고 풍부해졌다. 가사(歌辭)에도 능했던 박인로(朴仁老)의 《오륜가(五倫歌)》 등 70여 수의 시조작품을 비롯하여 장경세(張經世)의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나 이항복(李恒福)·(金尙容)·(南九萬) 등의 시조는 손꼽을 만한 작품이다. 내용면으로도 어지러운 당쟁을 통분한 이덕일(李德一)의 《당쟁차탄가(黨爭嗟嘆歌)》, 임진왜란의 용장 이순신(李舜臣)의 시조, 병자호란의 치욕을 비분하고 충의(忠義)를 읊은 봉림대군(鳳林大君)·김상헌(金尙憲)·이정환(李廷煥) 등의 시조가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시기의 을 대표하는 최고봉은 윤선도(尹善道)였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나 《산중신곡(山中新曲)》 같은 작품은 그의 자연시인으로서의 풍모를 뚜렷하게 할 뿐 아니라 시조문학의 가치를 한껏 발휘하였다. 윤선도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른 시조문학은 이후 평민작가들이 그 주역을 맡게 되면서 김성기(金聖器)·김유기(金裕器)·김천택(金天澤)·김수장(金壽長)·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 등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작자인 동시에 창곡가(唱曲家)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서민계층으로 흘러들어간 시조는 (辭說時調)라는 새로운 형태의 시조를 낳았는가 하면, 지난날의 시조를 수집·정리하는 가집(歌集) 편찬이 평민 가객(歌客)들 사이에서 성행하였다. 즉,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을 비롯하여 김수장의 《해동가요(海東歌謠)》, 박효관·안민영이 함께 엮은 《가곡원류(歌曲源流)》가 있으며, 그 밖에도 《고금가곡(古今歌曲)》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 《동가선(東歌選)》 등 많은 가집이 출현하였다.

한편, 가사문학에는 조선 전기에 속하는 정철 같은 대가에 이어 후기에는 그와 쌍벽을 이룰 만한 박인로가 나타났다. 그의 작품으로는 임진왜란 때 읊은 《태평사(太平詞)》와 《선상탄(船上嘆)》을 비롯하여 《누항사(陋巷詞)》 《사제곡(莎堤曲)》 《독락당(獨樂堂)》 《영남가(嶺南歌)》 《노계가(蘆溪歌)》 등 7편의 가사가 전해진다. 그러나 박인로의 특출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때 가사문학이 시조에 밀려 그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영조 이전까지는 이원익(李元翼)·이수광(李晬光)·무옥(巫玉)·임유후(任有後) 등이 가사의 명맥을 잇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숙종 이후 소설의 융성과 더불어 가사는 다시 번성하여 장편가사가 널리 창작되기 시작하였다. 영조 때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정조 때 안조환(安肇煥)의 《만언사(萬言詞)》, 헌종 때 한산거사(漢山居士)의 《한양가(漢陽歌)》, 철종 때 김진형(金鎭衡)의 《북천가(北遷歌)》, 고종 때 홍순학(洪淳學)의 《연행가(燕行歌)》 등이 모두 1,000여 구(句)에서 4,000구에 달하는 장편가사였으며, 그 밖에도 유명 무명의 작가들이 창작한 수많은 가사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영남(嶺南)의 부녀자 사이에서 주로 유행한 내방가사(內房歌辭)가 많이 전해진다.

조선 후기의 특기할 만한 문학양식으로서 판소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판소리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는 형편이지만, 대체로 근원설화(根源說話)가 판소리로 전화(轉化)한 뒤 이윽고 그것이 문자로 정착한 것이 판소리 계통의 고대소설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판소리가 언제부터 불렸는지 확실치 않으나, 기록에 따르면 그 시창자(始唱者)는 숙종 말의 하한담(河漢潭)과 최선달(崔先達)이었다. 《춘향가》를 비롯하여 《심청가》 《흥부가》 《토끼타령》 《장끼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변강쇠타령》 《화용도(華容道)》 《강릉매화타령》 《무숙(武淑)이타령》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등 판소리 열두 마당은 고종 때 신재효(申在孝)에 의해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타령》 《가루지기타령》 《적벽가(화용도)》의 여섯 마당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고대소설의 개화(開花)이다. 세조 때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가 나타난 이후 발전단계로 접어든 조선의 소설은 광해군 때 허균(許筠)의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출현시켰다. 흔히 최초의 한글 소설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은 계급사상을 타파하고 사회 개혁을 시사한 사회소설로서 당시의 시대 배경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주제를 다룬 것이었다. 허균에 이어 조선의 소설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이끈 작가는 숙종 때의 (金萬重)이었다. 그가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지었다는 《구운몽(九雲夢)》과 임금을 참회시키기 위하여 집필했다는 《(謝氏南征記)》는 김만중 소설에서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그 밖에 작자 미상의 《(彰善感義錄)》은 김만중의 작품과 같은 시대에 쓰인 회장소설(回章小說)로서 빼어난 작품이다. 이윽고 영·정조 시대로 접어들면서 전성기를 맞이한 조선의 소설문학은 (實學)의 발흥 및 중국소설의 유입과 함께 대단한 흥성을 보게 되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수백 종의 유명 무명 작가에 의한 고대소설들은 거의가 이 무렵의 소산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먼저 박지원(朴趾源)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마장전(馬駔傳)》 등 10여 편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는데, 비록 그 표기는 한문이지만 한국 사실주의 소설의 빛나는 걸작들이다. 엄격한 비판정신에 입각한 박지원 소설은 당시 양반 계층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이 무렵 중국소설의 영향으로 군담소설(軍談小說)과 염정소설(艶情小說)이 많이 등장했는데, 전자가 남성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여성의 문학이라 일컬을 만한 것이었다. 군담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임진록(壬辰錄)》을 비롯하여 《조웅전(趙雄傳)》 《유충렬전(劉忠烈傳)》 《임경업전(林慶業傳)》 《소대성전(蘇大成傳)》 《장인걸전(張人傑傳)》 《곽재우전(郭再祐傳)》 《장익성전(張翼星傳)》 《여장군전(女將軍傳)》 등이 있으며, 염정소설류로는 《춘향전》을 비롯하여 《숙영낭자전》 《옥단춘전(玉丹春傳)》 《운영전(雲英傳)》 《이진사전(李進士傳)》 등 다수의 작품이 전해지나 그 중의 백미는 《춘향전》이다.

그 밖에도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 등의 가정소설, 《심청전》을 비롯한 도덕소설, 《옥루몽(玉樓夢)》 등 일련의 기연소설(奇緣小說), 《흥부전》 등의 우화소설 등 여러 유형의 고대소설이 속출하여 소설문학을 풍성하게 하였는가 하면, 궁정기사체(宮廷記事體)로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문학도 발달하여 《(癸丑日記)》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 등이 나타났고 이와 같은 은 더욱 발달하여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閑中錄)》 《(意幽堂日記)》 등의 여류문학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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