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한국무용

신라의 한국무용

신라는 삼국 중 외래의 문화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으나 삼국 통일 후 삼국의 문화와 당대(唐代)의 악무를 흡수, 문화의 황금기를 누리며 문헌상으로도 많은 악무를 남겼다. 진흥왕 2년에 처음 시작된 (八關會)를 통해서 가무백희(歌舞百戱)를 연희하였는데, 춤의 형식과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중국의 산악백희(散樂百戱)와 유사한 점을 찾아볼 수 있어 중국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 13년(552) 왕명에 따라 우륵(于勒)은 계고(階古)에게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가르친 점으로 미루어 당시에는 춤과 노래를 각기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연행했음은 물론 당시의 예술적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진덕왕 5년(AD 651) 국가 기관으로 예부(禮部)에 음성서(音聲署)를 설치하여 국가적 연례와 제향 ·조하시에 악무를 연희했는데 전문인을 양성하고 활발한 창작활동을 벌였다.

당시의 춤으로는 <하신열무> <사내무(思內舞)> <소경무> <사내금무> 등으로 가야금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와 춤이 가미된 종합예술적 종목으로 궁중에서 행해졌으며, <한기무> <미지무> <대금무> 등은 가야금과 춤만으로 상연되었다. 이는 신라시대에 이미 금(琴, 가야금) ·가(歌) ·무(舞) 등으로 세분화되었으며 엄격한 규율하에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문헌상의 자료로서 신문왕 9년(668)에 신촌(新村)에서 대연(大宴)을 베풀었는데 이때 <하신열무> <사내무> <한기무> <상신열무> <소경무> <미지무> 등을 추었다고 하고, 애장왕 8년에는 <사내금무> <대금무>를 추었다고 한다.

또한 9세기말 헌강왕 때에는 <처용무>가 창작되었고 《삼국유사》 2권에는 <상염무>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즉 신라는 팔관회에서는 가무백희를 수반했고,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화랑과 승려, 임금의 명에 의한 가무의 창작이 활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에 창작된 춤으로는 <검무> <무애무> <처용무> <사선무> <선유락> 등으로 고려시대의 로 이어졌으며 <가야지무>는 옛 가야 땅에서 <오기>는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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