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의 프랑스문학

17세기의 프랑스문학

 개인주의와 무정부상태의 16세기가 끝나고 평화와 질서를 되찾으려는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자, 자각한 가톨릭이 신교를 받아들이게 되고 합리주의가 신앙과의 공존에 동의하게 되며, 절대왕권의 확립과 함께 중앙집권이 강화된다. 문학에서도 정리와 순화의 작업에 박차가 가해져 마침내 이성적인 절도와 균형으로 형식의 완비를 이룩하는 고전주의시대가 닥쳐와 루이 14세의 친정기간(親政期間)인 1661년에서 4반세기 동안이 그 고비를 이루었다. 따라서 그 이전의 60여 년은 고전주의 형성기로, 그 이후의 세기말은 18세기에의 전환기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르네상스 이래 갖가지 기원(起源)의 말들과 어법(語法)을 끌어들여 잡동사니가 된 프랑스어가 순화되어야만 했다. 시에서는 철저한 기교파 시인 말레르브가, 산문에서는 《서간집》 27권을 남긴 발자크가 언어개혁에 앞장서 간결 ·명석한 고전적 문체를 마련함으로써 고전파 걸작들을 낳는 길을 터주었다.

한편, 리슐리외에 의해 34년에 창설된 아카데미와 살롱 중심의 사교계도 언어순화에 큰 구실을 하였다. 특히 랑부예 후작부인(1588∼1665)이 1608년에 연 살롱을 비롯해 도처에서 열린 살롱들은 말씨와 예절과 취미를 세련시켜 우아와 중용과 양식을 존중하는 사교정신을 길러내고 조화와 질서를 으뜸으로 삼는 고전주의 정신의 온상이 되었다. 기사도 로망이나 장미 로망을 잇는 방대한 연애모험 소설들(오노레 뒤르페의 《아스트레》, 스퀴데리의 《그랑 시뤼스》 등)이나 발자크, 부아튀르의 은 이러한 살롱을 무대로 유행한 사교문학이다. 한편, 이와 같은 귀족문학의 이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에스파냐의 악한소설(惡漢小說)의 영향을 받아 유행한 뷔를레스크(burlesque)는 민중의 풍자정신의 산물로서 파블리오나 라블레를 계승하는 사실적 문학이다. 그러나 고전주의 형성기를 마무리지은 것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과 코르네유의 비극들이다. 이성과 논리를 으뜸으로 삼는 시대의 특성을 고루 지님으로써 고전주의 문학의 온갖 특질을 독자적으로 개척한 데카르트는 그 명석한 문체와 깊은 모랄리스트적 통찰에 의해 문학으로서도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그의 사상에 살을 붙여 운명과 싸워 이기는 의지의 비극을 창조한 코르네유는 3일치법칙 적용으로 긴축되고 실감나는 무대구성과 논리적이고도 웅변적인 대사의 문체에 의해 고전비극의 터전을 닦았다. 36년에 상연된 《르 시드》의 대성공은 극문학 중심으로 형성되는 고전주의문학 전반의 성공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61년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확립과 더불어 고전주의는 개화기, 이른바 ‘빛나는 시대’를 맞게 된다. 근대적 이성과 고대예술이 손잡으면서 인간성 탐구를 위한 형식 완비의 문학이 무르익어 파스칼, 몰리에르, 라신, 라퐁텐, 부알로 등의 수많은 걸작들이 프랑스 문학사를 눈부시게 장식한다. 이성의 전성시대에 신앙 없는 이성의 무력함을 증명하려 한 파스칼이 《팡세》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심리적 은 그리스도교 변증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떠나서도 인간성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모랄리스트적인 성실성과 ‘타오르는 기하학’이라 불리는 힘차고도 논리적인 문체에 의해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의 불안한 처지를 가장 먼저 깊숙이 파고든 영예를 차지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파스칼을 실존주의문학의 선구자라고 일컫는 사람도 있다. 한편, 살롱 중심의 사교계는 힘을 점차 잃어가면서도 몇몇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잠언집(箴言集)》(65)의 라로슈푸코와 《회상록》(71∼75)의 레스는 정계에서 얻지 못한 영예를 문학에서 얻었고, 랑부예 살롱 출신인 세비네 부인은 딸에게 쓴 《편지》로, 라파예트 부인은 코르네유의 비극을 방불케 하는 심리분석소설 《클레브 공작부인》(78)으로 고전주의의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고전주의의 정상은 아무래도 몰리에르의 희극과 라신의 비극이다. 오랜 극단생활을 통한 절실한 인간 관찰을 바탕삼아 소극(farce) 같은 중세희극의 온갖 요소를 집대성, 근대 국민희극을 완성시킨 몰리에르는 《타르튀프》 《염세가》 《구두쇠》 《여학자》 등 성격희극의 걸작들을 남겼다. 《르 시드》의 성공에서 31년이 지난 67년에 상연된 라신의 《앙드로마크》는 고전극에서의 새 세대의 승리를 기념하는 작품이었다. 이어 《페드르》(77) 등 9편의 걸작 비극만을 남긴 라신은 코르네유의 의지의 영웅 대신 운명에 짓눌리고 정열에 사로잡히는 인간을 그려내어 고전비극의 전형을 확립시켰다. 또한 그의 문체는 완벽한 12음절 시로서 프랑스 운문의 으뜸으로 일컬어질 만큼 내용과 리듬의 조화가 극치를 이루어 고전주의 이상의 더없이 순수한 표현이라 할 만하다. 라신의 운문과 더불어 프랑스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암송시키고 있는 우화시(寓話詩) 233편을 남긴 《우화집》의 라 퐁텐은 이 시대의 이채로운 존재이다. 다채로운 테마, 간결한 동물 묘사, 모랄리스트적인 인간 이해의 깊이 등도 놀랍지만, 테마에 따라 시구(詩句)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무기교의 기교는 라신의 그것과도 비겨질 정도이다. 한편, 적확한 판단과 표현, 억제된 감동, 웅대한 상상력 등으로 높은 문학의 경지에 다다른 《설교집》 《추도연설집》을 낸 보쉬에나, 《시학》 등의 저술로 고전주의 미학을 확립시켜 이 시대 대작가들의 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부알로도 특기할 만한 존재이다.

87∼97년 사이에 활발하게 벌어진 신구논쟁은 문단을 고대파와 근대파로 양분시켰으나, 고대의 아름다움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이성과 합리의 미래로 나아가자는 근대파가 승리함으로써 고전주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고전주의적 이상의 분해와 18세기 합리주의의 새싹이 공존하는 이 전환기의 움직임은 라브뤼예르, 페늘롱, 퐁트넬의 작품 속에 갖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라브뤼예르의 《성격론(性格論)》(88)은 현실 관찰의 기록으로서 사회의 본질적인 병폐에 대한 모랄리스트적인 고발이며, 저명인사들을 평하는 그 신랄한 어조는 보마르셰의 출현을 예고라도 하는 듯 다분히 18세기적이다. 보쉬예의 수제자인 페늘롱 신부는 왕세자를 위한 교육소설 《텔레마크의 모험》(99)에서 장차 왕이 될 자기 제자를 통해 프랑스에 시행하고 싶은 정치개혁을 암시하면서 루이 14세의 시정을 풍자 ·비평하였으며, 부알로의 《시학》에 버금가는 비평문학으로 꼽히는 《아카데미에의 편지》(1716)에서는 유연하고도 건전한 상식에 입각한 신구논쟁에 중재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라브뤼예르나 페늘롱은 그 생각이나 문체에서는 18세기와 맺어질 새로운 면을 보였으나, 고대문학에 대한 깊은 지식과 애착이라는 점에서는 17세기적이어서 신구 논쟁에서는 고대파인 부알로나 라신의 동조자였다. 개선문의 비명을 라틴어로 하느냐, 프랑스어로 하느냐는 문제에서 비롯된 이 논쟁은 1687년 1월 샤를 페로가 국왕의 병세회복을 축하하는 시 《루이 대왕의 세기》를 아카데미 회원 앞에서 낭독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고대인에 대한 근대인의 우월성을 선언한 이 시에 대해 부알로는 아카데미의 수치라 하였고, 페로는 다시 자기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고대인과 근대인 비교》를 발표, 인간 정신의 법칙은 진보라는 확신 아래 학문은 물론 문학에서도 근대인이 인간정신의 원숙기에 있음을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였다. 아카데미 회원들과 궁정 여성들이 이에 가담했지만 특히 퐁트넬은 《고대인과 근대인에 관한 여담》(1688)을 발표, 자연은 언제나 같고 그 힘과 작용도 한결같은 것인 만큼 오늘날에도 옛날 못지않게 뛰어난 사람이 생겨날 수 있으며, 각 시대는 그 발견을 다음 시대에 끼쳐주는 것인 만큼 근대인은 고대인의 사상에다 자기가 형성한 것까지도 덧붙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파스칼이나 몰리에르, 라신이 나온 이상 17세기가 고대의 어느 세기와 맞설 수 없다고 주장할 수도 없어 마침내 부알로가 페로와 화해하자 논쟁은 끝났지만, 진보라는 데카르트적인 관념을 문학에 적용시킴으로써 18세기 철학에의 길을 터준 신구논쟁은 하나의 정신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절대적인 권위로서 군림해온 종교나 군주정체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검토를 가해 보자는 생각은 몽테뉴 이래의 전통이지만, 이 ‘자유사상’이 이성 만능의 17세기에는 정작 루이 14세의 강력한 통제 밑에서 맥을 추지 못하다가 1680년 이후 왕권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다시 고개를 쳐들게 된다. 그리하여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퐁트넬과 베일이 자유사상의 투사로 등장하였다. 퐁트넬의 《신탁의 역사》(1687)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과학정신의 첫 공격이라면 베일의 《역사적 비판적 사전》(1697)은 사상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옹호한 첫 비판서로서, 투철한 회의사상과 비판정신을 통해 18세기 계몽사상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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