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칠보

서양의 칠보

서양의 고대 칠보에 대해서는 연대 ·지역 등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칠보는 유리질 칠보유(七寶釉)의 대부분이 이미 박리(剝離)되어 있어 그것이 가열 ·융착(融着)된 것인지 단순히 유리조각 또는 페이스트로서 충전 ·감입(嵌入)된 것인지 판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장신구 중에 칠보로 생각되는 유례(遺例)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를 포함하여 오리엔트 세계에서 헬레니즘 시기까지 칠보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캅카스 지방의 철기시대 분묘에서는 샨르베의 기법에 의한 청동제 쇠고리가 발견되었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주로 이오니아 지역에서 금의 세선(細線)을 꼬아서 구획을 만들어 그 곳에 유약을 넣어 녹여 붙인 일종의 클르와조네 칠보가 발달되어 장신구류가 만들어졌다. 이 유약은 녹색 또는 청색으로 당시 칠보가 청금석(靑金石)이나 공작석의 대용품 구실을 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의 칠보제품은 남러시아나 에트루리아 등으로 수출되어 다른 칠보예술의 기초를 쌓았다. 유럽 중부에서는 BC 5세기경부터 켈트인의 장식예술에 칠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BC 3세기∼BC 2세기경에는 잉글랜드나 아일랜드에도 전해졌다. 기법은 주로 청동을 소지로 한 샨르베로서 산화동에 의한 진홍색의 유약은 특히 아름답다.

로마시대의 칠보는 더욱 보급되어 쇠고리나 마구, 화장호(化粧壺) 등 소형 용기류에도 응용되었다. 그리스도교 예술의 발전과 함께 칠보는 제구 ·유물상자 ·경전의 표지 등 장식에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특히 비잔틴 세계에서는 그 색채와 광택이 애호되어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초기의 작품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성당에 있는 황금제단(6세기)의 칠보가 유명하고, 현재 베네치아의 산마르코대성당에 있는 파라 도로(황금장벽)를 비롯하여 각지의 교회당에 훌륭한 여러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다. 비잔틴 칠보는 금선을 이용한 클르와조네를 주로 해서 금 또는 은으로 도금한 소지에 부조의 소상(小像)이나 보석류와 함께 장식을 형성하는 점에 특색이 있다.

한편, 서유럽에서는 독일 북서부나 프랑스 중부에서 칠보예술이 유행되어 12∼13세기에 절정에 달하였다. 특히 쾰른과 의 두 도시는 칠보제작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기법은 주로 도금된 구리를 소지로 한 샨르베로 성기(聖器) 등을 비롯하여 묘비(墓碑) 등의 대형제품도 만들어졌다.

중세 말기부터 칠보는 기술적으로 더욱 발달되어 유질(釉質)의 균일화, 투명도의 증가, 가마의 개량 등에 따라 여러 새로운 기법이 생겨났다. 특히 1300년경 파리의 공인들이 시작한 투명유(透明釉)에 의한 클르와조네 또는 부조된 소지를 투명유로 덮는 바스타유(basse-taille)가 유행되었다.

르네상스 이후의 칠보는 중세에 확립된 기술을 기초로 발전되었으나 칠보화(七寶畵)를 제외하고 미술상의 역할은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조금(彫金)이나 조옥(彫玉)의 일부, 또는 보조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칠보화는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전반에 가장 유행되었고 그 중심은 리모주였다. 근세 이후 칠보는 다시 소형장식품에만 사용되어 루오 등 약간의 예외 말고는 회화적인 작품이 제작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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