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 미술

청의 미술

청 미술의 특징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은 회화이다. 그것은 명 회화의 연장이지만, 명대뿐만 아니라 중국 4000년 회화사의 종장(終章)을 장식하기에 알맞은 것으로써, 오랜 전통을 보유한 정통파가 이민족의 정복하에서도 그대로 화계(畵系)를 바꾸어나가, 양상을 변화시키며 최후의 빛을 발하면서 지평선 너머로 꺼져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 최후의 빛을 발한 화가로 석도(石濤)와 주탑(朱耷)이 있다. 이들은 명왕조의 왕실 출신으로, 명왕조 멸망 후 출가하여 선승(禪僧)이 되었으나 마음속에 불타는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화필을 구사, 기성 화가와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독특한 중국 의 예술을 쌓아올렸다.

이들과 같은 시대인 청초(淸初),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왕휘(王翬)·왕원기(王原祁)·오력(吳歷)·운수평(惲壽平:南田) 등 소위 4왕오운(四王吳惲) 등은 한 파를 형성하고 당시 화단을 이끌었는데, 석도·주답에 비하면 형식의 틀에 얽매여 예술적 감동은 적다.

청왕조 화원(畵院)은 궁정화가를 거느리고, 양식에 통일이 없이 (宋元畵) ·남화(南畵) 혹은 서양화까지 끌어들였으나 화단(畵壇)의 구석으로 밀려난 듯, 권위도 실력도 없었다. 중기에 이르자 상업도시 양저우[揚州]에 문인화를 전문으로 하는 일단이 나타나 남화의 전통을 이어 개성의 표현에 주력, 이단적인 존재로서 주목을 받았으나 너무 주관에 치우쳐서 신경지를 개척하지는 못하였는데, 화암(華喦:新羅山人) ·김동심(金冬心)만은 확실히 별격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청나라 초의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은 명왕조 판화의 흐름을 받은 금릉(金陵:南京)의 출판이지만, 금릉판화가 청대에 와서 쑤저우[蘇州]로 진출, 훌륭한 판화의 성행을 보게 되자 서양화의 과 음영법(陰影法)을 받아들여 서민예술로서 뿌리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청왕조 공예의 대표는 도자기인데, 강희 ·옹정 ·건륭의 3대, 백 수십 년간에 [景德鎭窯]를 비롯하여 여러 곳의 (官窯)에서 제작된 도자기는 일품으로서 서유럽 여러 나라에 수출되었다.

칠공예(漆工藝)로는 건륭·가경(嘉慶) 연간에 궁정 용구로서 대소 갖가지의 제품이 만들어졌으나 명왕조 작풍(作風) 답습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기교를 부리고 의장(意匠)도 부질없이 번거로운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인간의 재능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섬세한 기법으로 정성들여 만든 칠공예품은 유럽 각국으로 수출되어 진중히 간직되었다. 그 밖에 중국 특산의 옥(玉)이나 비취(翡翠)를 가공, 옥기와 세공물을 만들었으며, 이와 관련 있는 것으로는 유리를 재료로 한 화병 ·공기 ·향로 등도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건륭유리[乾隆硝子]’라 불리는 작품은 특히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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