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의 기원과 역사

천문학의 기원과 역사

천문학은 본래 인간생활의 필요에서 비롯되었다. 즉, 태양 ·달 ·항성 등의 주기적인 형상으로부터 계절의 변화와 순환을 알게 되어 농업에 필요한 을 만드는 일이 특히 제왕(帝王)의 중요한 사업의 하나가 되어 여기에 천문학자들의 두뇌가 이용되었다. (觀象授時 : 천체현상을 관측하여 백성에게 때를 가르친다)란 말이 고래로 임금의 사업으로 알려져 왔던 사실은 역사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즉, 천문학자는 태양과 달의 위치를 관측하여 달력을 만들고, 또 동양에서는 (日蝕)이 제왕의 큰 관심을 끌었으므로 그 예보에 힘쓰기도 하였고, 예보가 틀리면 천문관이 문책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일식은 그 당시 국가의 흥망과 관련된 천체현상으로 믿어졌기 때문이다.

달력의 제작이나 일식 ·(月蝕)의 예보에 사용되었던 고대의 유적으로 짐작되는 것으로는 약 4000년 전의 유적으로 알려진 영국의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Stonehenge)인데, 거대한 스톤헨지들의 방향은 태양이나 달의 출몰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달력의 연구는 농산물의 수확과 관계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의 홍수기가 되면 시리우스별이 새벽에 동쪽 지평선에 떠올랐는데, 이로부터 시리우스의 관측은 농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관측으로부터 1년의 길이가 365일임을 일찍이 알게 되어 이집트에서는 태양력(太陽曆)이 쓰이게 되었다.

그리스 시대에는 BC 4세기의 아리스타르코스처럼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는 천문학자도 있었지만, 특히 2세기의 프톨레마이오스로 대표되는 천동설(天動說)이 유력한 우주관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하고 있으며, 그 둘레를 태양 ·달 ·행성(行星) ·항성(恒星)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원운동으로 설명되지 않는 행성의 경우에는, 여러 개의 원운동을 합성한 복원운등(複圓運動)을 고안하였는데, 이러한 이론은 《알마게스트:Almagest》(140)라는 책으로 집대성되었다.

동양에서는 인도 ·중국 등에서 점성술과 관련되어 독특한 우주관이 이루어졌으나, 달력제작 ·일식예보에 치중된 천문학은 그 후 별로 큰 발전이 없어 후세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 서양의 근대천문학이 도입되었다. 서양에서도 중세에 이르러 천문학뿐만 아니라 널리 자연과학의 전반에 걸쳐 연구의 진전이 없었다. 이 시대에는 그리스시대 천문학의 집약인 《알마게스트》가 아라비아에 전승되고, 그 후 15세기에 유럽으로 다시 전달되었다. 그 후 유럽에서 자연과학의 연구가 부흥되어 16세기 말에 폴란드의 천문학자 N.코페르니쿠스에 의하여 지동설이 발표되어, 지구는 우주의 중심의 자리로부터 추방되어 태양의 둘레를 도는 하나의 행성으로 격하된 태양중심의 우주관으로 혁신되었으나, 천체의 원운동의 개념은 그리스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남기고 있었다.

한편 당시 최대의 관측천문학자인 덴마크의 T.브라헤는 관측기계를 정비하여 행성, 특히 화성(火星)의 위치관측에 종사하여 정밀한 많은 관측자료를 남겼는데, 그의 조수 J.케플러는 1609년에 그 자료를 정리하여 행성의 궤도가 사실은 원이 아니라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임을 밝히고, 행성의 운동에 관한 세 가지 법칙(케플러의 법칙)을 발견했다. 같은 무렵에 이탈리아의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지지하고 직접 만든 망원경으로 목성(木星)의 4개의 위성을 발견하고, 또 물체의 낙하운동의 실험으로 역학의 법칙을 알아냈다. 그 후 87년에 영국의 뉴턴은 케플러의 법칙, 갈릴레이의 실험결과 등을 통일적으로 정리하여 만유인력의 법칙, 운동의 3법칙을 발견하여 물리학의 발판이 되는 뉴턴역학을 확립하였다. 뉴턴역학으로 행성 ·달 ·위성의 운동이 지동설의 입장으로부터 설명할 수 있음이 밝혀지고, 천체역학이 새로 태어난 셈이다.

참조항목

, , , , , , , , ,

카테고리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