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의 진

전국시대의 진

 진나라 헌공(獻公) 때에는 순사(殉死)의 습속을 금지하고 BC 383년에는 동녘에 역양성(櫟陽城:陝西省 臨潼縣 북동)을 구축하여 동방으로의 진출 의지를 보여주었다. BC 362년 효공(孝公)이 왕위에 오르자 위(衛)나라 사람 상앙(商鞅)을 등용해 내정을 개혁하였다. 즉 종래의 혈연 존중의 인사를 고쳐서 공적에 따른 신분제도를 설정하고, 군사조직과 토지제도를 혁신하여 조세(租稅)를 공평하게 했으며, 병농(兵農)을 일치시켰다.

이때부터 종래의 읍(邑)과는 그 성격이 다른 새로운 현(縣)이 생겼고, 군주권이 현내의 서민과 직결되었다. 이같이 하여 국력이 증강된 진나라는 위(魏)나라를 공략해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기 때문에 위나라는 수도 안읍(安邑:山西省 解縣)에 불안을 느껴 대량(大梁:河南省 開封縣)으로 천도하였다. 진나라는 효공 때 수도를 셴양[咸陽]으로 옮겨 셴양은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남았다.

위나라의 대량 천도와 진나라의 국력 증강은 열국(列國)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열국은 연합전선을 펴 진나라를 관중(關中)의 땅에 봉쇄해 두려는 소진(蘇秦)의 이른바 ‘합종책(合縱策)’을 안출하였다. 이를 알게 된 진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은 공손 연(公孫衍)으로 하여금 ‘합종책’을 분쇄하도록 명하고, 장의(張儀)로 하여금 각국이 진나라와 단독강화를 맺게 하는 이른바 ‘연횡(連衡)’을 성립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책동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진은 파(巴) ·촉(蜀), 즉 쓰촨성[四川省]을 장악하고, 초(楚)나라로부터는 한수이강[漢水]의 상류를 빼앗았다. 이로써 진나라는 어느 때든지 초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혜문왕은 BC 325년부터 공(公) 대신 왕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로부터 다른 나라들도 모두 왕호를 쓰게 되었다. 소양왕(昭襄王) 때에 이르러 청두[成都] 부근에 운하를 열고 쓰촨의 옥야(沃野)를 개발하는 한편,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BC 278년에 대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郢)을 함락하고, 초왕 역대의 능역(陵域)이던 이릉(夷陵)을 불태워버렸다. 초나라는 허난[河南]의 진(陳:河南省 淮陽縣)으로 옮겨야 하였고, 뒤에 다시 수춘(壽春:安徽省 壽縣)으로 옮겼다.

진나라 군대는 양쯔강[揚子江]을 건너 다시 구이저우성[貴州省]의 동부와 후난성[湖南省]의 서부도 공격하였다. 백기 장군은 북방의 조(趙)나라도 공격하여, 장평(長平)의 싸움에서는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만을 구덩이에 생매장하고 수도 한단(邯鄲)에 육박하였으나,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의 원군이 투입되어 포위망을 풀고 철수하였다.

이즈음 진나라는 서제(西帝), 제(齊)나라는 동제(東帝)라고 높여서 ‘황제’ 칭호를 쓰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 다시 왕호를 썼다. 소양왕이 위나라 사람 범수(范睢)를 등용한 뒤부터는 그의 건의에 따라‘연횡책’을 버리고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로부터 진나라는 마지막 마무리 작전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진나라의 형세를 살핀 주왕(周王) 난(赧)은 열국을 ‘합종’하여 진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안 진나라는 주나라부터 공격을 시작하자 난왕은 영읍(領邑) 30과 인구 3만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주나라는 멸망하였고, 7년 후에는 동주군(東周君)도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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