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연극의 역사

중국연극의 역사

중국연극의 기원은 BC 10세기 전후의 서주(西周) 때 신에게 제사 지내던 무격(巫覡)의 가무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배우의 출현은 BC 7세기경의 춘추시대(春秋時代)인 것으로 짐작된다. 초(楚)의 맹(孟), 진(秦)의 전(旃) 등이 궁중의 풍유간언(諷喩諫言)에서 연기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대(漢代:BC 202∼AD 220)에 이르러 서역(西域) 여러 나라와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2세기경에는 가무 ·골계희(滑稽戱) ·곡예 ·환술(幻術) ·역기(力技) 등이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이를 통틀어 ‘백희(百戱)’ 또는 ‘산악(散樂)’이라고 일컬었고, 여기에서 가(歌) ·무(舞) ·악(樂) ·우(優)의 결합을 찾아볼 수 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인 악부(樂府)를 설치하고 민간의 가요를 채집하였으며, 수(隋)나라 양제(煬帝)는 해마다 정월이면 ‘백희’를 대대적으로 연희(演戱)케 하는 행사를 벌였다. 또한, 당(唐)나라 현종(玄宗)은 이원(梨園)을 설치하고 300명에 달하는 궁정 전속배우를 양성하였는데, 극단(劇壇)을 뜻하는 ‘이원’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당대(唐代:618∼907)에는 《대면(代面)》 《발두(撥頭)》 《답요랑(踏搖娘)》 등 가무와 음악이 결합된 형태의 가면극이 있었으며, 그 밖에도 ‘참군희(參軍戱)’라고 하여 참군 ·창골(蒼鶻)이라는 두 배역이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는 간단한 골계극(滑稽劇)도 있었다. 이는 모두 ‘백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당시 이미 모든 예능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11세기를 전후한 북송대(北宋代)에 이르자 ‘참군희’는 잡극(雜劇)이라 해서 5명의 연기자가 출연하는 소극(笑劇)으로 발전하고, 이를 상연하는 극장인 ‘구란(句欄)’도 나타났다. 또한, 금(金)나라와 남송(南宋)이 병립하던 12∼13세기에는 잡극이 남하하여 크게 융성하였고, 북쪽의 금나라에는 ‘원본(院本)’이라는 연극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잡극과 원본을 위한 희곡창작이 왕성해지기 시작하였다.

13세기에 몽골이 중원(中原)을 차지하고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문학적인 재능은 민간의 예술분야에서 돌파구를 찾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서 마침내 희곡문학의 융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북송의 잡극과 금나라 원본의 흐름을 잇고, 노래와 대사로 엮어진 ‘제궁조(諸宮調)’의 형식이 가미됨으로써 마침내 4막 구성의 ‘원잡극(元雜劇)’, 곧 ‘원곡(元曲)’이 성립되었다. 관한경(關漢卿)의 《두아원(竇娥寃)》, 왕실보(王實甫)의 《(西廂記)》 등 대도(大都:北京) 출신의 작가들이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배역도 말(末:주역) ·단(旦:여자役을 맡는 남자배우) ·정(淨:惡役) ·축(丑:익살스러운 역) ·잡(雜:단역) 등 20여 가지로, 이른바 ‘북곡(北曲)’이라는 연극형태였다.

14세기에 접어들자 ‘원곡’이 쇠퇴하면서 남쪽에서는 남송(南宋) 잡극과 민간의 악곡이 결합한 ‘남희(南戱)’가 성행하였다. 여기에서는 막수(幕數)에도 제약이 없어져 장편인 경우, 50막에 달하는 희곡도 있었으며, 고측성(高則誠)의 《(琵琶記)》를 비롯하여 원말(元末)에는 《형채기(荊釵記)》 《백토기(白兎記)》 《배월정(拜月亭)》 《살구기(殺狗記)》 등의 4대 걸작이 나타났고, 이것이 곧 ‘남곡(南曲)’이었다. 북곡이 북방의 어음(語音)과 곡조에 따라 7음계의 악곡을 사용하면서 현악기 반주에 의한 힘찬 표현을 특색으로 삼은 데 대하여, 남곡은 남방의 어음과 곡조에 따라 피리 반주를 주로 하는 5음계의 부드러운 악곡이었다.

명대(明代:1368∼1644)에 이르자 지난 시대의 남희가 연극적으로 더욱 발전하여 탕현조(湯顯祖) ·심경(沈璟) 등 ‘전기(傳奇)’라 일컬어지는 다막희곡(多幕戱曲)의 극작가들이 많이 배출되면서 중국연극은 다시금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민간예술로서 발전한 원곡에 대하여 명나라 때의 전기는 다시금 고관 ·귀족들의 손으로 되돌아가 풍아(風雅)하고 화려한 경향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었다. 전기의 곡조인 남곡은 원나라 말기부터 다양하게 분화해 왔고 16세기 중엽의 가수 위양보(魏良輔)는 당시 유행하던 여러 곡조에다가 북곡의 장점도 가미하여 섬세하고도 우아한 ‘곤산강(崑山腔:崑曲)’을 만들어내었다.

이후 중국연극에는 곤곡이 크게 유행하여 청나라 초기(17세기 중엽)까지 전기의 대부분이 이 곡조에 실려서 상연되었다. 곤곡은 무용성(舞踊性)이 강할 뿐만 아니라 피리 반주를 주로 하였으며, 엄격한 문학형식을 존중함으로써 온아하고도 고상한 연극으로 발전하였다. 무대의 연출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배역은 생(生:주역) ·단(旦) ·정 ·축 ·말(단역) 등 원곡이나 남희보다도 더욱 세분되었고, 검보(臉譜:얼굴 분장)의 창안과 아울러 인물의 신분과 성격에 대한 표현력도 한층 심화되었다. 의상 또한 명대(明代)와 그 이전의 것을 추상(抽象)하여 시대를 초월한 새로운 연극의상이 고안되었으며, 장치나 소도구도 다채롭게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중국연극의 기본형식은 대개 이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기작품(傳奇作品)은 청대(淸代)로 넘어온 뒤에도 《장생전(長生殿)》 《도화선(桃花扇)》 등의 대작이 나타났으나, 18세기에는 ‘아부(雅部)’라 하여 정통시되었던 곤곡도 이윽고 쇠퇴하는 가운데 ‘화부(花部)’라 하여 업신여김을 받아오던 다른 곡조에 의한 민간극들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1779년 북곡계(北曲系) ‘진강(秦腔)’의 여장남우(女裝男優) 위장생(魏長生)이 베이징[北京]에 진출하였고, 남곡 익양강계(弋陽腔系) ‘이황조(二黃調)’의 여장남우 고낭정(高朗亭)이 상경한 것은 90년이었다.

이황조는 19세기에 접어들자 정장경(程長庚) 등의 개혁을 거쳐 ‘경극(京劇)’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난해하고 지루한 귀족예술이 되어 있던 곤곡에 대하여 알기 쉽고 명쾌한 단극(短劇)을 주로 하는 경극은 또다시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여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극은 독창적인 희곡작품을 거의 가지지 못하였으며, 고래의 전설 ·소설 ·연의(演義) ·전기(傳奇) 등을 제재로 하여 그것을 각색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19세기 말까지 중국의 전통극 형식은 마침내 경극으로 집대성되고, 서사적 ·상징적인 표현양식에 있어서는 거의 완성된 경지의 예술로 무르익어갔다. 한편, 중국정권이 성립한 이후 1960년대부터는 내용면에서 경극의 형식이 변혁되기 시작하였으며, 사회주의 연극으로의 변신(變身)을 위하여 13 ·16 ·18세기에 치렀던 중국 연극의 변혁과 맞먹는 경극의 변질이 오늘날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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