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농민사

조선농민사

[ 朝鮮農民社 ]

요약 1925년 10월 29일 천도교청년당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농촌운동단체.
구분 농촌운동단체
설립일 1925년 10월 29일
설립목적 조선 농민의 교양과 계몽교육
주요활동/업무 농촌계몽운동, 농민야학운동, 월간지·야학교재 발행, 농민공생조합 설치

김기전(金起田), 조기간(趙基뗐), 이돈화(李敦化), 박사직(朴思稷) 등 청년당 세력과 이성환(李晟煥), 선우전(鮮于全), 이창휘(李昌輝), 박찬희(朴瓚熙), 김준연(金俊淵), 유광렬(柳光烈), 김현철(金顯哲), 최두선(崔斗善), 김경태(金炅泰), 황영환(黃英煥) 등이 규합하여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하였다.

초대 중앙이사장에는 이성환이 선출되었고, 본부는 서울에 있었으며 지방에 각 지부와 사우회(社友會)가 조직되었다. 1925년 12월에는 월간 《조선농민》을 창간하고 농촌계몽에 힘을 쏟아 1928년 2월 158개 지부에 1만 6570명의 사우를 확보하였다. 그해 2월 사제개정(社制改定)을 단행하여 사원의 범위를 , 자작 겸 소작농, 소작농, 농업노동자, 농촌 수공업자, 농촌 체력노동자 등으로 확대하였다.

지방조직은 이(里)농민사를 기본조직으로 하고 면(面)농민사, 군(郡)농민사, 전조선농민사(全朝鮮農民社)로 계열화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에는 사우 총수가 20만여 명에 이르는 방대한 조직이 되어 국내뿐 아니라 만주의 [延吉], 두도구(頭道溝), 훈춘[琿春], 백초구(百草溝), (寧古塔), 창춘[長春], 액목현(額穆縣), 관뎬현[寬甸縣] 등지와 일본의 오사카[大阪]에도 지사를 설치하였다.

1930년 4월 6일 제3차 조선농민사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천도교청년당측이 제안한 '법적 관계 3개 조안'의 통과로 자주적인 임원선출권과 결의권·운영권을 상실하게 되자 비천도교청년당측 인사들이 탈퇴하여 전조선농민사를 조직하였다.

그후 조선농민사는 천도교청년당 산하 단체로 그 성격이 축소되었고 1932년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이 본격화하면서 일제의 탄압과 등으로 조직이 약해져갔다. 1936년 4월 형태로 전환을 시도해보았지만 모금에 실패하여 해체되었다.

사업부서로 중앙에 서무부·경리부·교양부·알선부·선전조직부·조사출판부가 있었고, 지방에는 조사출판부를 제외한 부서들이 있었다. 보다는 민족독립과 농민의 지위 향상을 위한 계몽운동과 실력양성운동에 주력하여 전국의 이농민사마다 을 설립, 농민야학운동을 정열적으로 전개하였다.

한글·산수·작문·지리·역사·농업기술 등을 교육하였고, 《농민독본》 《한글독본》 《대중산술》(최승서 저), 《비료제조 및 사용법》(이지현 저), 《대중독본》(백세명 저) 등 야학교재를 발행하였다. 이외에도 《조선농민》 《농민》 《농민세상》 《조선최근사13강》(김기전 저) 등을 발간하여 농민의 교육·계몽을 위한 교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 책들은 일제 당국의 삭제 및 ·발매금지 등의 탄압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발행되어 농민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31년부터는 종래의 알선부 사업이 독립되어 일종의 인 농민공생조합(農民共生組合)으로 설치, 운영되었고 그 아래 생산조합인 농민공동경작계를 조직하여 농민의 경제적 생활 향상에 이바지하였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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