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의 전철화

철도의 전철화

철도는 증기기관차의 진보와 발맞추어 육성되어 왔는데 그 후 전기철도의 발달과 더불어 기설철도의 증기동력을 전기동력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것을 철도전화(鐵道電化)라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럽의 각국은 전화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여 국내 연료의 절약보존, 수력(水力)의 개발 및 이용, 철도경영의 개선 등 동력 및 산업상의 정책적 견지에서 철도전화는 일대 전환기에 들어가 부분적 전화를 넘어 전면적인 철도전화계획을 세워 실현에 박차를 가하였다.

현재 스위스의 간선철도에서는 1만 2000 HP 의 대출력(大出力) 전기기관차가 등장하는가 하면, 1955년에는 프랑스에서는 시속 331 km라는 경이적인 속도기록을 수립하고, 일본에서는 1964년 최고속도 260 km, 표정속도(表定速度) 200 km의 고속 교류전차를 운전하여 515 km를 3시간 10분에 주파하였다.

한국의 전기철도화계획은 일제강점기기인 192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착수되었다. 1931년 완성된 전력정책 기본계획조서에 근거를 두었던 것으로 이 조서는 한국에 있어 전력의 발생 ·분배 ·이용의 종합적인 추세를 고찰하여 장기대책을 수립하는 데 필요한 기본자료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 중 제4장 ‘조선에 있어서 교통기관의 전력 이용’항에서 및 사설철도의 상세한 전기운전계획이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자료는 단순한 기본조사에 불과하였으므로 32년 이후 다시 철도전화의 실행계획에 착수하였다.

당시 전화 예정구간은 경원선 복계(福溪)~고산(高山) 간 53.9 km였다. 그러나 그 예산안이 일본 의회에 통과되지 못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40년 이후에 실시하도록 보류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한 자원의 소진(消盡)으로 인하여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사설철도로 1931년 7월 철원~내금강 간의 금강산철도가 전철로 개통되어 관광철도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그 후 8 ·15광복과 함께 남북분단이란 단절 속에서 모든 분야가 그랬듯이 철도도 답보상태에 들어갔고, 더욱이 1950년 6 ·25전쟁의 와중에서 파괴된 철도는 1960년대 초반까지는 복구작업에도 힘겨워 전철화계획은 생각도 못할 상태였다. 그 후 사회의 안정과 산업의 발전이 본궤도에 접어들게 되자 정부에서도 필요성을 인식하여 1968년 철도전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1972년 산업선용 전기기관차의 도입과 더불어 태백선의 증산~고한 간 10.7 km가 전철화됨으로써 전기철도운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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