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역사

자유주의의 역사

역사적으로 자유주의는 중세의 사회원리에 대한 대항원리로서 등장하였다. 중세사회는 (領主)의 (農奴)에 대한 정치적·경제적·인격적 지배를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에 의한 전(全)사회관리를 로 삼아 그 양자의 복합체로 성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중세사회의 붕괴는 한편으로는 영주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전개와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교회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신앙형식의 전개라는 두 가지 동향(動向)의 복합에 의해서 그 계기가 주어지게 되었다.

전자는 생산력의 향상과 화폐경제의 침투로 말미암아 힘을 얻기 시작한 농노가 점차 영주권력에 의한 규제를 벗어나 경제활동에서의 자주성을 획득해가는 과정, 즉 자본제(資本制)로의 이행과정으로 전통과 권위와 경제 외적 강제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는 데에 물질적인 힘이 되었다. 후자는 으로서 나타난 동향이다. 신앙의 내면화에 바탕을 둔 새로운 대항교회의 형성은 광범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통일교회의 권위를 뒤엎는 에너지를 조달하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이 두 가지의 동향이 복잡하게 서로 얽혀서 마침내 영국·프랑스에 혁명이라는 돌파구를 열어 중세사회원리에 대신하는 새로운 사회원리가 확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상의 과정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첫째, 자유주의가 반드시 리버럴한 원리 내지 방법으로서 형성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지방영주의 할거성(割據性)을 타파하여 경제활동의 자유화와 통일적인 국내시장의 형성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절대군주의 폭력장치가 불가결하였으며, 또한 이 절대주의는 종종 신앙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로마 교황의 간섭을 물리치고 국내의 대항교회의 형성을 지원하기도 하고 관용정책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사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독일의 부르주아지는 시민적 자유의 옹호자로서의 절대군주 또는 계몽전제군주에 기대를 걸었다.

한편 M.루터나 J.캘빈 등은 개혁사상 속에 신앙의 내면화(개인화)의 계기를 담았으면서도 개혁된 교회의 권위의 강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예컨대 제네바라든가 독립 네덜란드에서는 관용과 학문연구의 자유를 주장하는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는 도리어 탄압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D.에라스뮈스 등의 관용사상이 아니고 개혁교회의 권위주의야말로 중세적 규범의 구속을 가장 효과적으로 분쇄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영국·미국·프랑스의 정치적 자유주의가 토론과 설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내란과 혁명에 의해서 쟁취되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는 역사적으로 볼 때 종종 자유주의에 대립되는 원리의 관철로 예기치 않았던 결과로서 귀결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둘째, 자유주의의 정치적 성격의 양의성(兩義性)에 대해서이다. 자유주의는 절대군주의 주권을 국민이 탈취함으로써 얻어졌는데, 이것은 의 절대성에 대한 단순한 승인은 아니었다. 국민주권은 어디까지나 신앙의 자유와 사적(私的) 경제활동의 자유와 같은 시민적 자유확보를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국민의 신탁을 담당하는 통치기관의 권력남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특히 엄격한 감시의 눈이 필요하게 되었다. 정교분리(政敎分離)··억제균형(抑制均衡)의 원리는 그 한 예이다. 여기서 정치권력에 대한 자유주의의 소극적 태도를 볼 수 있다.

한편 주권이 절대군주의 손을 떠나 개인이 국민으로서 주권을 형성할 경우에는 개인의 자유와 국가주권과도 아무런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거기에야말로 자유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권력은 국민의 것으로서 국민에 의해서 행사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정치권력에 대한 적극적 자세를 볼 수 있다. 자유주의는 이와 같이 정치에 대한 불신과 긍정과의 역설적 결합인 것이다. 영국혁명에서의 의 슬로건(자유로운 국가에서의 자유로운 교회)이나 프랑스혁명의 권리선언의 슬로건(사람 및 시민의 권리의 선언) 등은 이와 같은 양의성을 실제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셋째로, 이상과 같은 자유주의의 정치적 원리의 성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종교적 역할에 대해서이다. 이 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17세기의 영국이다. 거기서는 영국 국교회(國敎會)와 대항하는 캘비니즘계(系)의 수많은 (분파교회:分派敎會)가 형성되었다. 이들 섹트들은 소수집단으로서의 소수파의 자유를 요구하고, 신앙의 자유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여 이러한 요구를 바탕으로 저항의 통일목표를 쌓아올렸다.

한편, 이들 섹트에서 교회관(敎會觀)이 전환되었다. 전통과 신의 권위에 의거하는 강제조직으로서의 교회를 대신하여 신도(信徒)의 자주적 결사와 신도의 상호계약으로서의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이 교회관의 전환이야말로 국가관의 전환을 가져왔다. 다시 말해서 교회계약이라는 구상은 자주적 개인의 상호계약에 의한 국가형성이라는 구상을 촉발한 것이다. 자유주의가 '사회계약설'이라는 정치사상을 전개하기에 이른 배경에는 이상과 같은 종교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유주의는 중세적 원리에 대한 대항원리이면서도 그 모두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그 최성기(最盛期)에는 황제·제후(諸侯)를 제압할 만한 실력을 갖추었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정치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자율적 영역이 교회라는 형태로 성립하고, 이 자율적 영역이 거꾸로 정치권력을 수단으로 해서 규정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정치권력의 영역적 한정성·수단성이라는 근대 자유주의원리도 그런 점에 있어서는 중세적 유산의 계승이라 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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