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한국 실내장식

고대의 한국 실내장식

그러나 멀리 고대로 거슬러올라가 삼국시대 이래의 고건축(古建築) 실내장식을 살펴볼 만한 자료는 오늘날 매우 드물다. 불행하게도 한국에는 당시의 건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뿐더러 실내의 구성을 살펴볼 만한 문헌 또한 희귀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입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거듭되는 외침(外侵)과 내란으로 말미암아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고건축 중에는 고려 중기의 것이 한두 개 있을 뿐 모두가 고려 후기 이후에 세워진 건물들이다.

삼국시대에 한국에 도입된 중국의 진보된 건축기술에 의하여 세워진 건물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전모를 알 길은 없으나 고구려 벽화고분에 나타나는 건물의 그림들에서 당시 건축의 단편을 엿볼 수 있다. 즉, 평남 용강군(龍岡郡) 용강읍 쌍영총(雙楹塚)의 ‘전각도(殿閣圖)’를 보면, 장막건물(帳幕建物) 속에 그려진 기와집은 으로 용마루 끝에 망와(望瓦)로 보이는 장식이 붙어 있다. 이 그림은 당시 건물의 구조나 수법 등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그것은 조선시대의 건물과 비교하여 기본적인 양식 ·수법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의 건물을 짐작케 하는 자료로서는 몇몇 건물 유구(遺構)와 석탑(石塔)의 두 가지 유례(遺例) 외에는 현존하는 것이 없다. 다만 백제는 바다를 건너 중국의 남조(南朝)와 직접 교류함으로써 선진 건축술을 받아들였고, 다시 그것을 일본에 전수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당시 백제의 건축 기술자들에 의하여 세워졌다는 사원(寺院) 건물이 일본의 호류사[法隆寺]에 남아 있어 백제의 건물을 고찰하는 간접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신라는 3국 중에서 가장 늦게 통일국가체제를 갖춘 나라로서 초기에는 중국과 직접 교류할 통로가 막혀 있어 고구려 ·백제를 통해서 선진문화를 받아들여야만 하였다. 건축에서는 경주(慶州)를 중심으로 하여 많은 사원지(寺院址)와 몇몇 궁전지(宮殿址) 등이 남아 있으며, 특히 1975년 3월부터 76년 12월에 걸쳐 실시된 통일신라시대의 안압지(雁鴨池) 발굴 ·복원은 큰 의의가 있는 사업이었다. 이 곳은 원래 7∼9세기에 걸쳐 왕궁이 있던 자리로서 인공지(人工池)인 안압지 둘레에서 당시 건물의 건축부재(建築部材)로 사용된 목재 ·와전(瓦塼) ·금구(金具) 등이 대량으로 발굴됨으로써 통일신라의 건축술을 구명하는 데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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