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시조

고대의 시조

시조 발생에 대하여는 학설이 구구하나, 그것은 신라 향가(鄕歌)에 접맥되어 싹틀 기미를 마련했고, 고려 중엽에는 고려 장가(長歌)가 분장(分章)되어 그 형식이 정제되었으며, 고려 말기는 3장 12구체의 정형시로 정형되었으리라 믿어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고구려의 (乙巴素), 백제의 (成忠), 고려 초기의 (崔冲) 등의 것이 있고, 고려 말기의 우탁(禹倬)·이조년(李兆年), 방원(芳遠:太宗)의 《하여가(何如歌)》, (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 등 10여 수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날로 계승·발전되어 송강(松江) (鄭澈), 고산(孤山) (尹善道), 노계(蘆溪) (朴仁老) 등의 대가를 배출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黃眞伊)를 배출하여 시조의 난숙, 절정기를 이루었다. 양반들에 의해 지어진 종래의 단형(短型)시조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한 산문정신에 힘입어 양반의 생활권을 넘어 평민계급으로 파급되면서 그 형식은 평시조의 소재이던 자연에서 눈을 돌려 실생활에서 소재를 구해 장형(長型)로 분파되었다.

조선 중기를 넘어서 시조가 양적으로는 늘어났으나 질적인 저조를 면하지 못하였다. 영정조(英正祖)시대에는 구전되어 오던 시조의 일실(逸失)을 염려하여 편찬사업이 성행하였다.

1728년(영조 4)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효시로, 63년(영조 39)에는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海東歌謠)》, 1876년(고종 13)에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의 《가곡원류(歌曲源流)》, 그 밖에 《고금가곡(古今歌曲)》 《동가선(東歌選)》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 《객악보(客樂譜)》 등의 시조집들이 쏟아져 나왔음은 시조의 보존을 위한 쾌사였다.

조선 후기까지 시조 편수는 2,000여 수에 달하는 방대한 것으로 거기에 담긴 사상과 정서는 한국의 역사를 시간과 공간으로 그대로 꿰뚫어 모은 정신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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