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묘의 기원과 역사

소묘의 기원과 역사

거친 바위 표면에 동물들의 형상을 대충 선으로 나타낸 선사시대 동굴벽화도 일종의 소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소묘가 미술 역사에 처음 나타난 것은 르네상스시대이다.

중세 서양에 참된 뜻으로서의 소묘가 없었던 것은, 소묘의 정신적 바탕이 되는 화가의 개인적 자유가 없었고 물질적 바탕이 되는 종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15세기에 비로소 소묘가 나타났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이디어 스케치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뒤러 등에 의해 소묘는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화가들은 많은 소묘를 남겼다. 그리려는 유화나 를 위하여 매우 세밀하게 그린 것에서부터 즉흥적으로 그린 것, 모델을 스케치한 것, 손이나 머리 같은 부분을 연구하면서 그린 것에 이르기까지 화가 자신들을 위한 작업의 일종이었으므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소묘를 소중히 다루었다.

17세기에 루벤스와 렘브란트는 소묘에 붓과 먹을 사용하였으며, 명암 대조를 극적으로 표현한 데생을 주로 다루었다.

18세기에도 소묘는 명암을 그리는 데 집착하여 궁정취미의 우아하면서 자극적인 정취를 나타내었다. 다만 에스파냐의 고야만이 붓과 먹 외에도 펜 ·크레용 · 같은 여러 가지 재료로 자신의 작가적 기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회화를 대표하는 다비드와 앵그르의 소묘는 뚜렷한 윤곽선과 정확 ·세밀한 대상묘사가 엄격하였고, 낭만주의회화를 대표하는 제리코와 들라크루아는 격렬한 (mouvement:動勢)을 강조하여 힘과 운동감에 넘치는 격렬함을 나타내었다. 그 뒤를 이은 자연주의나 사실주의회화는 대상을 현실에서 찾는 새로운 입장이었으나, 실제로 소묘에서는 대상을 현장에서 스케치한 것이 아니었다. 가령 도미에가 그린 《의원(議員)의 캐리커처》 같은 것은 먼저 의회에서 의원들을 본 다음 화실에 돌아와 점토(粘土)로 인물상을 만들어 그것을 보고 그렸다고 한다. 대상을 충분히 관찰한 다음 기억을 되살려 그리는 수법은 쿠르베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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