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시아의 서적

소아시아의 서적

근년에 발굴된 (江) 상류의 로마 유적에서 가죽종이로 된 문서가 출토(出土)되었는데, BC 200년경에 이미 아시아에서 가죽종이를 사용한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 가죽종이를 의욕적으로 서적의 재료로 사용하고 문헌의 보존과 전달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은, 의 《》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소아시아의 에서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던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왕 2세(재위 BC 197∼BC 160)는, 부왕(父王) 아탈로스 1세의 뜻을 받들어 학예(學藝)면의 진흥에 힘을 기울였는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못지않은 도서관을 만들 계획으로 당시 이집트의 5세 에피파네스왕(재위 BC 203∼BC 181) 밑에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을 하고 있던 대문헌학자(大文獻學者) 를 페르가몬 궁전으로 초청하려 하였다.

왕은 노하여 아리스토파네스를 투옥하고, 나아가 페르가몬에 파피루스 수출을 엄금하였다.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파피루스를 대신할 물건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즉, 당시 소아시아가 양 ·염소 ·소 등이 많이 생산되는 사실에 주목하고 옛날부터 해오던 방식과는 달리 이들 동물, 특히 새끼양이나 송아지의 가죽을 서사(書寫)의 재료로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파피루스처럼 째질 염려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질기고 빛깔도 흰 양질(良質)의 서적재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가죽종이가 파피루스를 완전히 몰아내는 데는 다시 수백년이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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