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진

한국의 사진

한국에 사진이 처음 들어온 것이 문헌상으로 밝혀진 것은 1884년 지운영(池運英:初名 運永)이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 마동(麻洞)에 사진관을 차린 때부터이다. 그는 통리외무아문(統理外務衙門)의 주사(主事)로서 일본을 드나들면서 남보다 먼저 새로운 문물에 접했던 것이다. 그는 천부적인 예술적인 소질뿐만 아니라 건장한 체구와 날렵한 기민성, 그리고 큰 담력의 소유자였으나, 수구파와 개화파의 싸움에 그만 잘못 말려들어 비운의 일생을 마침으로써 그의 사진의 맥은 중도에서 끊기고 말았다.

사진의 본격적인 도입과 기술적인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이때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국진출에 힘입어 일본인들의 사진관이 여러 곳에 생기고, 당시 고종(高宗)의 시종이며 (英親王)의 서예 스승이었던 서화가 김규진(金圭鎭)이 석정동(石井洞)에 본격적인 사진관을 차렸다. 그 당시 사회적인 위치나 서화가로서 예술계에서 차지했던 큰 비중으로 그가 차린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은 사진도입기에 있어서의 요람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서화가로서 사진에 대한 관심이 크던 중 왕실(王室)의 편의를 제공받아 일본의 노노미야[野野宮] 사진관에 가서 1년 동안 사진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림과 글씨를 쓰는 한편, 사진관을 차린 것이다. 어느 나라든지 사진의 도입과 정착과정에서는 사진관의 영업사진사들이 초창기의 초석을 놓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한국도 사진술을 받아들여 뿌리를 내린 1930년대까지의 초창기는 영업사진가들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도입과 정착기

한국 사진의 초창기의 길을 맨 먼저 열어놓는 영업사진이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생겨났다. 한말(韓末)에 열강(列强) 사이의 한반도를 놓고 벌어진 각축전이 일단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일본문화가 물밀듯 들어왔다. 이에 따라 일본인 영업사진사들이 경향 각지에 사진관을 차렸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들로부터 사진을 배운 한국인들이 독립해서 사진관을 내게 됨으로써 전국적으로 수가 차츰 늘어갔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일제의 식민정책하에서 일본인들이 상권을 독차지한 영업사진계에서도 한국 나름의 발판이 일단 잡히게 되었고, 1926년 한국인만으로 뭉쳐진 경성사진사협회(京城寫眞師協會)가 결성되어 회원들 사이의 친목과 아울러 사진예술의 창작의욕을 북돋는 한편, 질적인 향상을 꾀하게 되었다.

초창기의 기반이 이 정도로 다져지는 데 한 몫을 담당한 것은 1910년 설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학교(皇城基督敎靑年會學校) 사진과의 사진교육이었다. 미국에서 사진술을 배우고 돌아온 최창근(崔昌根)이 강의를 맡았으며, 1927년 도쿄사진전문학교를 졸업한 신낙균(申樂均)이 후에 뒤를 이은 이 교육기관은 1935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25년 동안 800명 남짓한 사진사를 배출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지금까지 일반에게 과학적인 신기함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정도의 사진이 그런 대로 영업사진관의 융성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창간으로 뉴스 사진의 싹이 터서 사회적인 진출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단계에 이르러 개인사진전을 가진 사진가가 나왔는데, 1929년 정해창(鄭海昌)이 서울 광화문 빌딩에서, 서순삼(徐淳三)이 평양 《조선일보》 지국에서 각각 개인전을 가졌다. 정해창은 서예가인 동시에 수필가로서 어느 정도 그 이름이 예술계에 알려진 아마추어 사진가였고, 서순삼은 평양에서 삼정사진관(三正寫眞館)을 차렸던 영업사진가인 동시에 지방주재의 보도사진가로 일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사진의 초창기의 주류를 이루는 영업사진 일변도의 흐름 속에서 아마추어 사진가와 보도사진가 사이에 분명한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대개영업사진관의 사진사들이 이것들을 모두 함께 담당하고 있었다.

아마추어 사진의 성장기

한국의 아마추어사진의 성장기에는 사진이 특별한 기술로서, 아무나 쉽사리 손을 댈 수 없는 전문적인 것으로부터 일반인들 속으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엄밀하게 따지면 1930년대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와, 1945년 미군의 진주에서부터 1950년대 말까지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즉, 일제강점기와 8·15광복 후 제1공화국이 끝날 때까지의 시기이다. 1930년대는 한국사진사에서 아마추어 사진계가 형성되던 때이다. 이때 서울에서는 경성 아마추어 사진구락부와 뒤를 이어 백양사우회(白羊寫友會)가 결성되었으며, 대구를 비롯한 각 지방의 사우회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아마추어 사진계가 형성되고 활성화하는 데는 《경성일보》가 주최한 '전조선사진살롱' 공모전과 《조선일보》가 마련한 '납량사진전'의 연례적인 사진행사가 끼친 영향도 컸다.

1945년 8·15광복 이후에는, 그전까지 지방과 지역 단위로 모였던 사진단체가 전국적인 조직체로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이 조선사진예술연구회(朝鮮寫眞藝術硏究會)이며, 6·25전쟁 후에 한국사진작가협회(韓國寫眞作家協會)가 조직되었다. 이로써 1950년대가 끝날 때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된 사단(寫壇)은 2개의 사진단체가 주도(主導)하였다. 이 시기는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의 시기로 한국사진계가 급속도로 성장한 시기였다. 해외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사진기와 사진재료의 범람으로 아마추어 사진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는 반면, 지금까지 사진의 주류를 이루어오던 영업사진계가 퇴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나타난 뚜렷한 현상은 전국적인 사진계의 테두리가 잡힘과 동시에 세계 속의 한국사단이라는 시야(視野)의 확대이었다. 그리하여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해외로 사진을 출품하는 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사진이 다른 모든 예술과 함께 예술로서 한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프로 사진의 정착기

1960년대부터는 정식으로 사진계가 사진인들만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사회 속에 자리잡은 시기였다. 그 두드러진 실례로는 지금까지 사진인끼리만 모여 있었던 전국적인 단체가 5 ·16군사혁명과 함께 전국 예술단체 총연합회 산하의 한국사진협회(韓國寫眞協會)에 하나로 통합되었고, 사단(寫壇)의 등용문이 사사로운 방법이 아닌 사회적 공식기구에 의해 열리게 된 점이다. 1960년대에는 사진이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미술의 한 부문으로서 출품되었으며 동아일보사가 ‘동아 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사진살롱’을 매년 개최하였다.

한편, 사진이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새로운 동기로서는 대학에 정식으로 사진과가 독립해서 설립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그 동안 산발적으로 발간되던 사진전문지가 정상적으로 발행될 수 있는 기반을 잡게 되었다.

또한, 상업사진과 보도사진이 고유한 장르로서의 발판을 굳히기 시작했다. 그동안 신문들이 창간된 이래로 뉴스 사진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보도사진이 제 성격을 찾기 시작했으며, 선전과 광고를 목적으로 하는 상품과 패션을 전문으로 하는 상업사진이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프로 사진가들이 출현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따라 아마추어 사진가들 가운데는 지금까지의 단순한 취미나 도락(道樂)에서 벗어나 프로와 구별되는 아마추어만의 특유한 자기영역을 모색하는 조짐이 나타났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공모전(公募展)에의 출품 위주에서 벗어나 라이프워크(lifework)로서의 자기작업을 시도했으며, 단편적인 사진촬영이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이고 종합적인 대상추구의 길로 들어섰다. 1970년대는 5개년 경제개발과 계속적인 산업사회로의 탈바꿈으로 보도사진과 상업사진이 더욱 활발해졌으며, 아마추어 사진인구가 날로 늘어나 사진은 이제 일상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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