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제국의 후기

비잔틴 제국의 후기

국내의 봉건화가 많이 진행되고 대외적으로도 노르만과 셀주크투르크 외에도 재건된 불가리아 왕국, 독립 세르비아 왕국 등과 직면한 비잔틴 제국은 1204년 와 손을 잡은 제4차 십자군 원정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당하며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십자군을 이끌던 라틴계 지휘관들은 그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비잔틴 제국 영토를 종군자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안에 식민제국을 수립했다. 그 결과 , 테살로니카, , 등에 라틴계 봉건국가가 세워졌다. 서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신생 라틴 봉건국가들을 이용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려는 야심을 드러냈으며, 이에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계 국민들의 격한 적개심을 보였다. 제 4차 십자군 원정이 마무리되자 비잔틴 제국 성직자들의 노력과 계속되는 투르크족의 공격으로 라틴계 봉건국가는 차츰 쇠락하게 되었다. 특히 비잔틴의 잔존 세력이 니케아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1261년 미카일 8세(재위 1261∼1282)의 지휘 하에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여 최후의 비잔틴 왕조인 팔라이올로구스 왕조(1261-1453)를 세웠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예전의 위용을 되찾지 못했고, 제국은 트라브존 독립왕국(Empire Trebizond, 1204~1461)과 에피루스 봉건왕국(Despotate of Epirus, 1205~1479)으로 분할되었다. 그리스 북부와 서부는 불가리아, 세르비아, 이탈리아, 프랑스의 속령이나 식민지로 전락했고, 오직 콘스탄티노플만이 거대한 성벽도시국가로 남게 되었다. 비잔틴 황제는 서유럽과 투르크족 등의 위협에 대해 교황청에 도움을 청했으며, 교황청은 매번 콘스탄티노플을 로마의 감독교구로 두는 문제만을 거론했으며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이는 이미 서유럽에서 교황의 권위가 세속정치세력에 비해 실추되었고 서유럽 내의 정치적 갈등과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베니치아, 제노바 등 상업 도시국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 결과 13세기에 들어서면서 몽골족의 침입을 받기 시작한 비잔틴 제국은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해 용병을 고용해야만 했고 그 유지에 막대한 세입을 지출했다.

몽골의 침입으로 쇠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1331년에 소아시아 전역을 투르크족에게 점령당했으며, 계속되는 재정 궁핍과 기근으로 유민이 속출했다. 교황청의 제한적 지원과 서유럽의 무관심 속에 투르크족은 승승장구했으며, 오스만투르크인은 1365년 유럽으로 건너와 수도를 부르사에서 아드리아노플로 옮김과 동시에 발칸 침입을 개시하였다. 그 결과 1389년에 이르러 북부마케도니아 왕국,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오스만투르크의 봉신국가로 전락했다. 황제 마누엘 2세(Manuel II, 1391~1425 재위)가 유럽을 순회하며 지원을 호소했으나 교황청의 원조모금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의 감독교구에 종속할 것을 동의했으며, 이에 폴란드, 헝가리 등의 동유럽 국가들이 십자군을 모집해 비잔틴 제국을 지원했으나,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투르크군에 패배했다. 오스만투르크군은 1453년 공격을 시작한지 7주 만인 1453년 5월 29일에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는 약탈을 3일로 제한하고, 신앙에 관용을 베풀 것을 약속했다. 이어서 아테네, 모레아, 트레비존 독립왕조가 항복했고, 콘스탄티누스 11세(Constantine XI, 1448~1453 재위)가 사망하며 비잔틴 제국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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