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제국의 중기

비잔틴 제국의 중기

7세기 초부터 비잔틴 제국에서는 가 를 대신하여 공용어가 되었으며, 군단장이 주둔지역의 속주행정(屬州行政)을 겸무하는 군관구제도(軍官區制度)가 창설되는 등 문화적·사회적으로 그리스화(化)가 많이 일어났다. 도시는 외적에 대비하여 요새화되고, 농촌지방에는 이제까지의 대토지 소유를 대신해서 소토지 소유 농민으로 조직된 농민공동체가 우세하였다.

비잔틴 제국의 중기 본문 이미지 1황제대주교비잔틴제국군관구제둔전병제

특히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등지의 주요 상업도시들을 점령했기 때문에 도시의 상업 문화가 쇠퇴했다. 그러나 지방도시와는 달리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 제국의 공격을 잘 막아내며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유스티아누스 2세(Justiniam II, 재위 685~695, 705~711)를 마지막 황제로 한 헤라클리우스 왕조(Heraclian Dynasty, 610~695, 705~711)의 뒤를 이어 나타난 이사우리아 왕조(Isaurian Dynasty, 717~802)의 레오 3세(Leo III, 재위 717~741)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e V, 재위 741~775)는 동부 전선에서 이슬람 제국과 사투를 되풀이했다. 비잔틴 제국이 오랜 기간 이슬람 군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콘스탄티노플을 보호하는 견고한 성벽과 비잔틴 제국만이 보유했던 "그리스의 불"이라 불렸던 유동성 화약 무기 덕분이었다.

당시 국내적으로는 ‘우상(성화상)파괴주의(iconoclasm)’의 종교정책이 개시되었으며, 그에 따르는 혼란이 아모리아(Amorian) 왕조(820~867)까지 이어져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황제 레오 3세는 726년부터 730년에 걸쳐 모든 건축물과 기념물 등에서 성상을 파괴하고 이를 십자가로 대체하도록 했다. 또한 730년에 칙령을 내려 건축물 뿐만 아니라 모든 미술품과 공예품에서 성상 대신 십자가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에 성상숭배자였던 콘스탄티노플 주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해임되었다. 이러한 우상파괴주의에 대해 많은 반발이 이어졌으며, 특히 로마에서는 교황 그레고리 2세(Gregory II)가 두 차례의 종교회의를 열어 레오 3세를 비난했다. 레오 3세가 이에 대응하여 그레고리 3세의 교황령 일부를 빼앗는 등의 갈등이 일어났으며, 레오 3세의 사망 이후에도 콘스탄티누스 5세가 우상파괴주의 정책을 지속했다. 로마 교회는 우상파괴주의에 크게 반발했으며, 콘스탄티누스 5세가 754년에 개최한 종교회의에도 참석하지 않는 등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이에 대해 콘스탄티누스는 강력히 성상숭배자들을 박해하기로 했으며, 결국 로마 교회의 이탈을 초래했다. 로마 교회가 이탈하자 비잔틴 제국은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전역을 상실했으며, 그 후 로마의 보호자로서 비잔틴 황제 대신 프랑크 국왕 카를이 800년 성탄절에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다. 유일해야 할 그리스도교 세계가 동·서로 나뉘어 병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세계의 양분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제국은 843년에 성화상숭배(聖畵像崇拜)가 최종적으로 부활할 때까지 약 200년 가까이 황금기를 누렸다. 특히 9세기 중반부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한 비잔틴 제국은 873년 이탈리아 남부 바리(Bari)를 회복하는 것을 시작으로, 크레타 섬(963년), 사이프러스(965년), 안티오키아(969년)을 차례로 회복하며 동부 지중해를 장악했다. 이어서 1014년부터 1018년까지의 전쟁으로 불가리아 제국을 멸망시켰으며, 11세기 초부터 발칸 지역 전체를 회복하여 북쪽의 도나우강부터 남쪽의 크림반도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당시 제국을 통치하던 마케도니아 왕조(867~1056)는 비잔틴 예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영광 뒤에는 속주(屬州)의 호족들이 점차 대두하여 소토지 소유 농민을 예속시키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또한 비잔틴 황제는 우상파괴운동 이후로 정교회를 이끌던 주도권을 상당 부분 상실했으며, 정교회는 이단 시비에 빠지지 않도록 새로운 교리와 규범을 제시해야만 했다. 결국 1054년 (正敎會)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최종적으로 분리되었다.

마케도니아 왕조에 이어 비잔틴 제국을 통치한 콤네노스 왕조(1081~1185), 앙겔로스 왕조(1185~1204) 시대 까지는 대내외적으로 비교적 순조로웠다. 11세기 후반 제국의 동쪽에서는 셀주크투르크인이, 서쪽에서는 노르만인이 새로운 강적으로 부상했으나, 콤비노스 왕조의 창시자 알렉시우스 1세(Alexios I, 재위 1081∼1118)는 노르만인의 침입을 막고, 또 때마침 개시된 제1회 십자군을 이용하여 셀주크투르크로부터 소아시아의 실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요한네스 2세(John II, 재위 1118∼1143), 마누엘 1세(Manuel I,재위 1143∼1180) 밑에서 비잔틴제국은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비잔틴 제국은 노르만, 셀주크투르크 등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서유럽의 십자군에 의존하면서 내부적으로 과거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유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십자군 원정의 목적은 종교적인 것 뿐만 아니라 단순한 모험심, 전리품, 영토팽창 등으로 다양했으며, 이들 십자군에 의존한비잔틴 제국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비잔틴 제국은 12세기 이후 서유럽의 근거지를 모두 잃고,  해상 교역권의 많은 부분을 베네치아 등의 상업도시국가에 빼앗겼으며, 자국의 영토를 서유럽의 정치적·군사적 분쟁 해결의 도구로 내어주게 되었다. 그 결과 서유럽 십자군 세력은 니케아, 안티오크 등에 왕국을 세우고 정착해 통제권을 행사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서유럽의 야심에 반발한 콤비누스 왕조는 십자군 원정 정책을 거부하는 정책을 택했다. 이에 십자군은 1204년 퇴각길에 콘스탄티노플에 난입해 약탈을 자행했으며, 그 후 제국 영토 내의 트라키아, 테살로니카, 아테네, 모레아 등에 봉건국가를 세웠다. 많은 학자들이 성화상숭배가 부활한 843년부터 콘스탄티노플이 십자군에게 약탈당한 1204년까지를 비잔틴 제국의 중기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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