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의 제3기
마르트르광장의 잔다르크 기마상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영국왕으로 즉위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內紛)을 이용하여 와 결탁하고, 1415년 맹렬한 기세로 노르망디를 진공(進攻), 아쟁쿠르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대패시켜 북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탈취하였다. 헨리 5세는 이를 배경으로 1420년 트루아조약을 맺고, 스스로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승인시켰다.
그러나 샤를 6세의 황태자 샤를(샤를 7세)과 이를 지지하는 는, 이와 같은 영국측의 강요를 인정하지 않은 채 중남부 프랑스에 거점을 두고 전쟁을 계속하였다. 142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황태자가 샤를 7세로서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음을 선언하였다.
이에 영국군은 1428년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하였으므로, 샤를 7세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리한 전황을 승전(勝戰)으로 전환하게 한 것은 바로 잔 다르크의 출현이었다. 그녀는 적은 수의 프랑스 병사로 오를레앙의 영국군을 격파하였으며, 그뒤 항상 선두에 서서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그 결과 그 해 샤를 7세는 정식으로 (戴冠式)을 거행하고 적법(適法)한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샤를 6세가 영국과 맺은 트루아조약은 사실상 그 뜻을 상실하였다. 그 다음해인 1430년에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파에게 체포되어 영국측으로 인도된 끝에, 1431년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 무렵 전황은 이미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1435년 동안이나 항쟁을 계속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도 아라스에서 화의를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내란은 끝을 맺었다. 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1444년 툴에서 휴전(休戰)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 내에 ·보르도 ·칼레 ·노르망디 등의 영토를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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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의 오를레앙 입성 출처: doopedia.co.kr